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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6 1,281회 0건




29. 휴가 끝 - 관리 대상, 연구 대상




항상 그랬던 것 처럼 지혜는 지금도 욕실 문을 닫지 않고 씻는다. 나는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듣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물줄기 아래에 서있는 지혜의 벗은 몸이 아니라, 아이린의 얼굴이다.

아까 뷔페에서 지혜 새엄마가 얇은 연어조각을 지혜 아빠의 입에 넣어주면서 먹어보라고 말했을 때,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 때 아주 잠깐 아이린의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스쳐갔었다. 나와 지혜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줄 때에도 나는 아이린의 얼굴을 꼭 한번씩은 쳐다보았다. 그 때마다 아이린의 얼굴에 활짝 피어있는 웃음 뒤에는 뭔지 모를 애잔함이 숨어있었다. 모두들 즐거워하는 자리였지만, 아이린에게 만큼은 결코 그렇지만은 않았음을 나는 눈치챘다. 이런 근심이 가득한 아이린의 얼굴이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우선 아이린에게 카톡을 보내기로 했다. 자판에서 키를 누르는데 손이 떨려서 오타가 자꾸 난다. 지금 이 곳의 상황을 전할 수 있는 말을 간신히 써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누나, 지혜 팬티 들고 내려와 주세요. 빨리요."



그리고 나서 바로 아이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가 몇 번 울리고 그녀가 전화를 받자, 나는 바로 끊어버렸다. 그녀가 잠을 자다가도 깼으니까, 나는 마음을 놓고 아이린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지혜의 팬티"라고 분명히 적었기 때문에, 눈치 빠른 아이린은 이해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으로는 지금 이 상황에서 지혜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아이린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방금 있었던 일로 보면 나로서는 능력부족이다.


나는 내가 아까 입고 있었던 티셔츠와 반바지를 다시 챙겨 입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탁자에는 아까 열지 않은 캔 한 개가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 캔을 열고 한 모금을 마셨다. 캔이 냉장고 밖에 오래 있은 탓인지 시원한 맛이 전혀 없다. 괜히 마셨다는 후회가 든다.

그런데 아이린은 내 방으로 내려오는 대신에 카톡으로 나에게 답장을 보냈다.



"잠이 안오네. 혹시 안자면 냉커피 마시러 올라와요."



나는 아이린이 보낸 메시지를 읽고 욕실로 갔다. 더 이상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문 옆에 서서 지혜에게 말했다.



"지혜야, 엄마가 올라오라고 하시네. 잠시 갔다 올께."
"지금 이 시간에 엄마가 오빠를 왜 오래?"

"내가 어떻게 알아? 나 올라간다."
"응. 오래는 있지마."



나는 방을 나서서, 계단을 올라가서 복도로 들어섰다. 문밖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서로를 안고 키스했다. 아이린이 문을 열고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별 일 없었지?"
"별 일 생기기 전에 올라왔어. 냉커피는 됐어요?"

"기다려. 얼음만 넣으면 돼."
"안돼. 못기다려. 혹시 차가운 맥주는요?"



나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갈증 때문에 뭔가 차가운 것을 빨리 식도로 넘겨야 했다. 침대에서는 경식이가 자고있는 것이 보인다. 아이린은 냉장고에서 캔을 꺼내왔다. 나는 캔을 받아서 열고, 몇 모금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이린은 이러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얼음 다 넣었어요?"
"하다 말았어. 이제 마저 할께."



아이린은 미니주방으로 돌아가서 얼음을 깨느라고 탁탁 소리를 낸다. 잠시 후에 커다란 플라스틱 잔에 얼음이 둥둥 떠있는 냉커피가 왔다. 아이린은 내 앞에 나와 마주앉았다. 나는 얼음만을 남기고 마실 수 있는 대로 모두 마셨다. 그리고 나서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아이린에게 물었다.



"왜 안내려왔어요?"

"내가 갑자기 지혜 속옷을 들고 나타나면,
지혜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불만을 가질 수가 있거든.
내가 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올라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

"누나, .. 나 .. 너무 너무 힘들어."
"나도 알아. .. 자기 지금 그 나이에 그걸 다 참느라고 어땠을까?"

"이번 한번은 간신히 넘겼지만,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 때는 나도 더 이상 장담할 수 없어요."

"그래. .. 지혜가 이 일을 나중에라도 알면 자기한테 고마워해야 할텐데. .."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아."

"몇일 전에 지혜가 나한테 자기 친구들이 경험했다는 얘기를 했거든.
얘가 날더러 자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는 거야.
그런데 나한테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네가 사랑하고 또 너를 사랑해주는 남자라는 확신이 들면,
그 때 몸과 마음을 열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해주었거든.
지혜가 내 말을 엄청 진지하게 듣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라고.
그 때 지혜의 그 모습이 얼마나 기특해 보였는지 ..
그런데, 얘가 지금 자기를 그 확신이 드는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그것.. 난 모르겠고. ... 누나, 냉커피 다시 한잔 돼요?"



아이린은 내가 마시던 잔을 들고 미니주방으로 갔다. 그런데 내 전화기로 전화가 오는데, 지혜다.
아이린은 얼음 깨는 소리를 탁탁 내고 있다.



"안와?"
"엄마가 지금 냉커피 타시네."

"냉커피? 시원하고 맛있겠다. 그럼 나도 마시러 올라간다. 나도 부탁해."



나는 아이린에게 지혜도 냉커피 마시러 올라온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문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혜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일어서서 문을 열어주었다. 저만큼 지혜가 오고있다. 지혜는 험악한 인상으로 나를 보고 나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소파에 앉았지만, 지혜는 여기 저기를 바쁘게 왔다갔다 한다. 내 옆자리로 오는데 보니까 아까 입었던 긴 티셔츠 안에는 아까 입었던 핫팬츠가 없다. 아마도 아까는 입지 않았던 팬티를 이번에는 입고 온 것 같다. 그러니까 지혜가 지금 여기에 올라온 것은 냉커피를 핑계삼아 팬티를 입으러 온 것 같다.

아이린이 냉커피 두 잔을 들고 소파로 왔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는 얼음이 다 떨어졌어."

"지혜 너는 자기 전에 커피 마셔도 되니?"
"오빠, 나는 커피를 마시면 잠이 훨씬 더 잘 온다니까. 하하."

"그런 것은 쟤가 나를 닮았나봐."



지혜가 같이 있어서 나는 뭔가 얘기를 해야 했다. 우리는 내일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다. 아이린은 피곤하니까 그냥 바로 서울로 가자고 했고,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찍 출발해서 동해안으로 돌아서 가자고 했다. 한참 얘기를 하다가 나는 일어섰다.



"누나, 나는 내일은 하루 종일 운전만 하겠네."
"그래요. 너무 늦어서 걱정된다. 지금이라도 빨리 내려가서 주무세요."

"오빠, 빨리 내려가자. 내가 재워줄께."
"너도 내려가려고? 너 때문에 오빠가 잠을 못 자면 어쩔래?"

"하긴 내가 쫌 .. 하하하.
그래도 걱정하지마.
내가 오빠를 덮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테니까. 하하하"



쪼끄만게, 완전 거짓말이다. 내려가면 분명 덮칠꺼면서.

아이린은 내게 윙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안심하라는 뜻 같다. 그렇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지혜는 내게 팔짱을 끼고, 우리는 방을 나섰다.

내 방으로 와서, 나는 옷을 벗고 팬티바람으로 침대에 누웠다. 지혜는 내 침대로 와서 내 옆으로 눕는다. 나는 지혜 쪽으로 돌아누워서 팔벼개를 해주었다. 지혜도 나에게 파고들듯이 덤벼들면서 내 등으로 팔을 감는다. 나는 눈을 감고 지혜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는다.



"나 재워준다며?"
"오빠가 나한테 팔벼개를 해주니까, 나도 .."

"그럼 네가 나한테 팔벼개 해줘."
"팔벼개는 어른이 애한테 해주는 거죠."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를 재워?"
"잔소리 하지 말고 빨리 자. 이렇게 해도 재워주는 거야."

"돌겠다. 뭐든 지 네 맘대로네. 완전 조폭이야."

"뭐야? 여신보고 조폭이라니?
아까 새엄마가 한 말 못들었어?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차지한대잖아?
오빠 확실하게 챙기려면 .. 나 이제부터 싸울꺼야."



지혜가 하는 이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지혜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랑 싸우겠다는 거야? 지혜는 계속해서 뭐라고 웅얼거린다. 그런데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나에게 잠이 오기는 커녕, 말랑거리는 지혜의 몸 때문에 오던 잠도 다 도망간다. 아이린은 도대체 뭘 믿고 날더러 안심하라는 말을 하는 거야?

지혜는 한참 동안 내 입술과 혀를 빨고, 내 위로 오르락 내리락을 몇 번 한 후에야 조용해졌다. 지혜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지혜가 자기 체력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아이린 생각이 옳았다.

지혜가 조용해지고 나니까 이제는 내 마음이 시끄러워진다. 시간은 벌써 새벽 4시이다. 나는 건너편에 있는 침대로 옮겨갔다. 아이린에게 카톡이 왔다.



"자요?"
"지혜는 방금 잠들었어요. 나도 이제 잘꺼야."

"수고가 많으시네. 잘자요."
"누나도 잘자."





다음날 아침에 경식이가 내려와서 우리를 깨웠으나, 지혜가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경식이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올라갔다. 나도 계속 잤다. 한참 후에 아이린이 내려와서 나를 깨운다.



"11시인데 어떡해요?"
"그럼 일어나야지."



나는 지혜를 깨웠다. 그런데 지혜가 이제는 엄마가 뻔히 보는 것을 알면서도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며 내 입술을 빨아댄다. 아이린은 보기에 민망한지 고개를 돌려버린다.



"경식이랑 짐을 이리로 내려올께."



아이린은 이 말을 하고 급히 방을 나갔다. 지혜도 내게서 떨어져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서 가방을 꾸렸다. 그런데 경식이가 가방을 메고 양손에 들고 낑낑대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린과 지혜도 뒤따라 들어온다.

우리는 모두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렇게 우리의 여름 휴가는 막을 내린 것이다.

나와 아이린은 체크아웃을 하고, 우리는 지하주차장에 있는 아이린의 차로 갔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차에 타는데 지혜가 말했다.



"엄마는 잠을 너무 많이 자니까, 차라리 경식이랑 뒤에 타. 내가 오빠 옆에 탈께."



우리는 모두 차에 탔다. 나는 해운대를 한 바퀴 돌아서 아이린과 애들이 마지막으로 구경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달맞이길로 들어섰다. 윤기숙과 주영심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까도 생각해보았으나 나는 도대체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중간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식당을 찾아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형. 부산에 해운대 말고 또 볼 데가 있어?"
"광안리, 태종대, 송도, 자갈치. .. 이런 데에 볼 것이 제법 많아."

"오빠, 다음에는 더 오래 있게 시간을 잡자."
"나한테는 이 정도도 엄청 버겁고, 정신없거든. .. 너는 나중에 남친이랑 다시 와."

"오빠! 진짜 이럴꺼야?"
"누나, 형 말이 맞거든. 우리가 이번에 사고를 쫌 쳤잖아. 아빠도 다녀가시고 .."



우리는 부산을 출발해서 기장, 고리, 진하 그리고 울산을 거쳐서 포항에 오니까 벌써 해가 진다. 포항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하면서 아이린은 걱정하는 말을 했다.



"이제부터는 밤길이고, 보이는 것도 별로 없을꺼야. 또 얘들도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 것 같아요. 우리 서울로 바로 가요."
"엄마 말이 맞을 것 같아. 괜히 오빠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엄마 말대로 해요."
"형. 나는 벌써 졸려요. 하하하."



지혜와 경식이도 아이린의 말에 찬성했다. 우리는 동해안은 다음으로 미루고 경주, 대구를 거쳐서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애들을 오피스텔로 올려 보내고, 아이린과 함께 PC방에 가서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중에 아이린을 아파트에가지 태워다 주고, 아이린의 차를 주차장에 주차해두었다.



"휴우.. 이제야 휴가가 정말 끝난 것 같아."
"자기 너무 고생했지?"

"누나가 몸 고생, 마음 고생을 너무 많이 했죠.
이번 휴가가 누나한테는 휴가가 아니었을 것 같아."

"자기가 알아주네. 고마워."



아이린은 날더러 빨리 가서 쉬라면서 재빨리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지친 몸을 이끌고 내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서 경식이가 들여놓은 가방을 소파 옆으로 들고 갔다. 그런데 이제서야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느껴진다. 나는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고 소파에 앉았다.

목으로 차가운 맥주가 넘어가면서 시원한 느낌이 온 몸으로 짜릿하게 퍼진다. 나는 습관처럼 TV를 켰다. 그런데 내 눈길은 TV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관쪽을 향하고, 문이 열리고 지혜가 쏘옥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이다. 화장실에 간다고 두 번 일어난 것을 빼고는 오래만에 푸욱 잤다. 지혜가 와서 깨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저녁때까지라도 잤을 것이다. 마치 이제 휴가가 시작된 것 같다.



"오빠는 웬 잠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자?
엄마가 더 이상 못 기다린다고 깨워서 데려오래."

"잘 때는 자야지."
"오빠, 밥도 안 먹고 잠만 자다가, 오빠 죽으면 어떡해?"

"하하하. 걱정도 참 .. 지금 몇 시?"
"두 시 넘었어."



지혜는 거리낌없이 내 침대로 들어와서 내 위로 기어올라온다.



"일어나라며?"
"오빠 한번 덮쳐보자. 헤헤."

"까불고 있어."
"내 친구가 자는데 친척 오빠가 덮쳐서 사고쳤대."

"그건 자는 여자를 남자가 덮친거지."
"그거나 그거나 덮친 것은 같은 것 아냐?"

"글쎄? 너 지금 나랑 사고치려고 이러는거야?"
"에이. .. 다음에는 내가 잘테니까 오빠가 나를 덮쳐줄래?"

"너는 친구들이 했다는 것은 전부 따라서 해보고 싶니?"
"당연하지. 이렇게 잘생긴 오빠가 있는데, 나라고 못할 건 뭐 있어?"


"공부를 잘해봐. 그럼 해줄께."
"어떻게 잘해?"

"우선 국, 영, 수, 과에서 1등급 하나만 만들어봐."
"미친 거 아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무슨 재주로 1등급을 해? 컨닝이라도 할까?"

"야아. 그게 왜 말이 안되는데?
내가 실력이 없냐? 잘생기지를 않았니?
이런 나한테 공부하면서 그걸 못하면 말이 돼?"

"엉? .. 그래? .. 그럼 1등급 하나 땡겨오면?"

"해달라는 것, 100만원 안쪽에서 사달라는 것 다 해결해줄께.
"진짜지?"

"응. 진짜야."
"나중에 딴소리 하기 없기다?"

"내가 나중에 딴소리 하는 것 본 적 있어?"
"알았어. .. 내신이 됐건, 모의고사가 됐건 우선은 1등급 한 개를 땡겨라 이거지?"

"그렇다니까."
"오빠, 각오해. 흐흐흐."



내가 이 말을 할 때에는 지혜가 1등급을 받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혜는 1등급을 받을 애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침대에서 나왔다. 지혜는 아이린에게 내가 일어났다고 전화를 했다. 내가 씻고 나왔는데, 아이린과 경식이가 와있고 배달 음식이 식탁에 가득 차려져 있다. 음식을 보는 순간 내게 갑자기 허기가 느껴진다.

우리는 식사하면서 부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지나간 일들을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돌이켜 생각하고, 서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들이 하는 이야기의 한가운데에는 나도 껴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뿌듯하다.

그런데 경식이가 내 전화기를 들고 와서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방효은에게서 온 전화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소파로 갔다. 방효은은 이번 휴가가 끝나기 전에 한번 만나자는 말을 했고, 나는 시간을 내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에 시간 안돼요?"
"무슨 일인데 그래? 급해?"

"수희 언니한테 전화를 했었는데, 언니가 오빠한테 말하라고 해서요."
"전화로 하면 안되나?"

"직접 만나서 하려고 .. 나 지금 신촌에 있는데."
"시간이 좀 걸려야 하는데."

"나도 지금은 그렇고, 이따가 저녁 먹고 나서요."



나는 권혜주가 일하는 와인바 오라리오에서 저녁 8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방효은도 오라리오에 몇번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혜의 표정이 심상치않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지난 번에 방효은과 만났을 때에는 윤기숙과 그녀의 3인방이 알게 될 것에 대해서 겁을 먹었지만, 휴가를 갔다오고 나니까 왠지 그런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오라리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오빠, 여자 만날꺼지?"



지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아이린과 경식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혜를 쳐다보고 있다. 지혜는 눈에서 금방 불꽃이 튀어나올 것처럼 나를 보고 있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이야."
"엄마, 오빠가 휴가 중에 여직원을 왜 밖에서 만나? 이게 정상이야?"

"글쎄.. 못만날 것도 아니구만.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신경과민이니?"
"맞다. 누나가 약간 오바하네."



경식이는 이 말을 하고 나에게 윙크를 던지면서 방을 나갔다. 아이린은 식탁 정리를 하고, 지혜는 내 옆으로 와서 앉는다.



"신촌에 오라리오가 어디야? 거기 나도 같이 가면 안돼?"
"거기는 와인바라서 19금인데?"
"사촌언니 민증 가져가면 되거든요."



나는 엄청 당혹스러워 하는데, 아이린은 무척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



"지혜야. 오빠 사생활도 있는데, 너 지금 너무 하는 것 아니니?"
"엄마, 오빠가 그 여직원을 그냥 만나는 거라면, 굳이 안될 것도 없잖아?"

"알았어. 그럼 같이 나가자."
"앗싸아."

"집에서 7시 반에 나갈꺼니까 시간 맞춰서 준비해."
“콜.”


지혜는 준비하겠다면서 방을 나갔다.



"저녁 7시 반에 나가는데, 무슨 준비를 3시부터 하죠? 진짜 어이없다."
"내가 봐도 쫌 그렇네. 하하하. 그런데 지혜 데리고 나가서 어쩌려고?"

"저 고집 한번 시작하면 누가 막아요?"
"자기가 자꾸 받아주니까 쟤가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

"받아줄 일은 받아주지만, 아닌 것은 아니죠."
"그래. 그거야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아이린과 같이 PC 방으로 갔다. 오래만에 경식이와 함께 게임도 하고, 또 아이린이 여기 저기를 청소하는 일도 도왔다.

지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저녁 7시에 오피스텔로 갔다. 그런데 내 방에는 지혜가 앉아서 TV를 보고있다가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지금 지혜는 완전히 변해서,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운 몸매와 앳된 얼굴의 여인이 되어있다.



"어라? 너.. 이게 지금 뭐야?"
"처음으로 오빠랑 같이 외출하는데, 신경 좀 썼지. 헤헤."

"뭘 어떻게 했는데, 네가 이렇게 변했어?"
"목욕갔다 와서 미장원에 가고 .. 나머지는 그냥 화장하고 .. 그게 다야."

"그 화장 누구한테 배웠어?"
"부산에서 원피스 살 때, 그 언니가 가르쳐준 그대로 했는데? 나, 이상해?"

"엄청 이상해. 엄청 예뻐서 그런가? 하하."
"하아. .. 난 또 .."

"왜?"
"오빠 맘에 안들까봐 은근 걱정을 했거든요."




지혜는 내 두번째 슈트를 꺼내와서 날더러 입으라고 했다. 나는 방효은이 어떤 옷차림으로 나올까를 대충 예상하고, 그냥 진과 남방으로 나가겠다고 말했으나, 지혜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나랑 나가려면 오빠가 나한테 맞춰야지."
"아무리 그래도 이 더위에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야?"

"오빠는 나랑 같이 나가기 싫어?
내가 같이 간다고 우기니까 지금 억지로 가는 거야?"

"그게 아니라, 이렇게 입으면 나는 땀 때문에 정신줄을 놓을 수도 있거든."
"택시 탈꺼야. 노인네가 더위 때문에 위급해지면 119를 부르면 되고 .."



나는 지혜의 고집대로 흰 와이셔츠에 어두운 바다색의 슈트를 입었다. 지혜는 부산에서 산 원피스를 입고있다. 그리고 엄마의 구두 중에서 이번에는 굽이 낮은 것을 신었다.

우리는 택시에 탔는데, 타자마자 지혜가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에어컨 빵빵하게 부탁해요. 안그러면 이 오빠 기절하거든요."



지혜가 한 이 말 덕분에 택시 안에는 찬바람이 일었다. 택시는 신촌 오라리오 앞에서 서고,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2층으로 계단을 올라가는데, 지혜가 내 팔에 팔짱을 낀다.



"오빠, 은근히 떨려."
"왜?"

"몰라. 이런데 처음이라 그러나?"
"너 오늘 술 많이 마시면 안돼."

"알았어. 딱 한모금만 마실께."



맑고 깨끗한 지혜의 얼굴에는 벌써 붉은 색이 스며들어있다. 오라리오 안으로 들어서자 권혜주가 나와 지혜를 보고 깜짝 놀란다.



"오빠, 어떻게 이렇게 ..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119 불러줘?"
"기숙이는 신경 안쓴다니까 너 알아서 해."

"걱정 마. 기숙이도 조금 있으면 온대. 룸 비어있는데, 갈래?"
"뭐야? 기숙이가 온다고?"

"응. 일본에서 누구 왔다고 뭐라고 하던데. 잘은 모르겠어."
"룸은 나중에 보고 다시 얘기하자."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방효은을 찾았다. 그런데 방효은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다가, 나를 보고 손짓을 한다. 나는 지혜와 함께 그리로 갔다. 지혜는 여전히 내게서 팔짱을 풀지 않는다.

나는 방효은의 앞자리에 지혜와 함께 앉아서, 지혜와 방효은을 소개하여 서로 인사를 시켰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한거야?"
"으음.. 얘기하기가 쫌 그렇네."

"지혜 때문에?"
"난 오빠가 혼자 나올 줄 알았지."

"간단하게 말해. 복잡한 것은 내가 어떻겦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권혜주가 와인과 안주를 가져오고, 우리 세 사람에게 잔을 놓으며 내게 물었다.



"오빠, 내가 따라도 돼?"
"뭐. 그래 주면 영광이고. 하하"

"기숙이 방금 들어와서 룸으로 갔거든. 오빠 왔다는 말은 아직 안했어."
"기숙이 혼자 아니지?"

"둘. 언니라던데?"



권혜주는 우리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권혜주는 원래 손님 테이블에서 와인을 따라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것을 뭔가 권혜주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입구 쪽이 갑자기 시끄러워지면서 남자들 네 명이 우르르 들어온다. 우리는 그 쪽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들 중에 한 명이 나를 알아보았다. 정창현이다. 우리 과 선배이고, 지금은 졸업하고 건축회사에 다닌다.



"야. 김태현. 너 오래만이네."
"어라. 창현이 형."



그가 웃으며 내게로 온다. 그런데 그를 쳐다보던 방효은의 얼굴이 굳어지며 당황스러워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형, 오래만입니다."
"너,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어? 효은이도 있네. 그럼 저쪽은?"



나는 그에게 지혜를 소개했다. 그는 짓궂게도 나와 지혜가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말했는데, 지혜가 껴들어서 결정적인 단서를 내세우며 한마디 했다.



"우리 지금 커플링 하고 있는데요? 이 정도면 눈치 채셨죠?"
"어? 그렇네. 아는 동생이랑 커플링 하고 다니는 미친놈은 태현이 말고는 없지. 하하."



그는 일행이 있다면서 나에게 자기 명함을 주고 그들에게로 갔다. 그런데 그가 가고 나니까 방효은이 안절부절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 나중에 전화할께."
"어? 갈래?"



방효은은 빠른 걸음으로 홀에서 나가버렸다. 지혜가 내게 물었다.



"저 언니 뭐야?"
"왜?"

"나 있다고 오빠한테 할 말도 제대로 안하고,
또 아까 그 남자를 보더니 놀라서 도망가잖아."

"글쎄. 난 모르는 일이야."
"그럼 이제 우리 둘이 마셔도 되는 거지?"


우리 둘이 잔을 들고 건배하는데, 창현이 형이 우리에게 잠시 실례하자면서 방효은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는 방효은이 마시던 잔에 들어있는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태현이 너, 솔직하게 말해. 효은이랑은 어떤 사이냐?"
"방효은은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알바생인데요."

"너, 쟤랑 절대 엮이지 마. 내 말 명심하고, 진짜 조심해.
여친이 옆에 있는 데 할 말은 아니지만, ..
아무튼 여친께서는 어리버리한 태현이 잘 관리하세요."

"형은 방효은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쟤 한남여대 다니지?
내가 작년부터 사귀는 여자애가 거기 다니거든.
내가 아는 것만 해도 .. 차마 내 입으로는 말 못하겠거든.
이것 한 가지만 말할께.
쟤 학교에서 완전 저명인사랜다.
쟤를 거쳐간 남자애들이 줄을 선대요.
너는 거기 낄 생각 절대로 하지마.
쟤는 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애야."

"형이랑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있을 뻔 했는데, 여친 때문에 간신히 비켜갔지.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효은이도 알거든.
그러니까 지금 나를 보자마자 도망갔구만."

"난 그냥 .. 쟤가 회사일로 보자고 해서 .."

"회사일 좋아하시네.
어쨌든 오늘 이 자리에 여친이랑 같이 나온 것은 참 잘한 일이야."



그는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지혜가 내게 말했다.



"거봐. 내가 오빠랑 여기 오기 잘 했대잖아."
"누가 뭐래?"

"고맙다고 해. 빨리."
"꼬맹이, 정말 고마워. 하하."



나는 지혜의 허리에 팔을 둘러서 내 쪽으로 당겼고, 지혜는 내 어깨에 기대온다. 아마도 화장만 아니었다면 분명 나에게 키스하겠다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어느새 윤기숙이 와있다.



"오빠."
"어? 기숙이 왔네."

"잠시 나 좀 볼래요?"
"여기 같이 앉아서 얘기하면 안돼?"

"뭐. . .안될 것도 없어요."



지혜가 기숙이에게 잔을 갖다 주고 와인을 따라준다.



"영심이 언니랑 여기 같이 왔는데, 내일 점심 시간에 본다면서요?"
"그래. 영심이도 나 여기 온 것 알고 있어?"

"아까 혜주가 불었어요. 비밀이라야 해요?"
"아니.그런 것 전혀 없어. 그런데 무슨 일이지?"

"영심이 언니 말로는 한수정 언니가 지난 월요일부터 컨퍼런스 때문에 도쿄 와세다 대학에 와있대요.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일요일 저녁에 우리나라에 들른다는데. 오빠는 전혀 모르시죠?"

"모르는 일인데."
"내일 언니가 오빠 만나면, 오빠한테 별 일 없으면 인천 공항에 같이 나가자고 그럴 것 같네."

"알았어. 말해줘서 고마워."
"이따가 룸에 안올래요?"

"여행에서 막 돌아와서 지금 엄청 피곤하거든. 우리 노는 것은 다음주에 하자."
"알았어요. 그럼 난 이만 .."



윤기숙은 룸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지혜가 나에게 물었다.



"저 언니가 왜 오빠랑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지?"
"어? 그랬어? 이 반지가 동아리반지라고 말 안했나?"

"저 언니도 같은 동아리야?"
"응."

"캐나다에서 온 언니면 오빠 여친이네?"
"그렇겠지?"

"지금 일본에 있고, 일요일 저녁에 한국에 온다고?"
"난 아직 모르는 일이야."

"몰라? 그런데도 둘이 사귀냐?"
"네가 보기에도 쫌 그렇지?"

"아까 그 남자분 말대로, 오빠 진짜 어리버리네.
내가 오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오빠는 위험하다고 했거든?"

"그건 그렇다고 하고, 이제 우리 그만 갈래?"
"왜 그래? 있으면 있을수록 재미있는 사건들이 계속 터지잖아?"

"재미는 무슨 재미?"
"처음 오자마자 이러 저런 일 겪어봐. 재미있거든요."

"이런 것은 고딩들이 모르는 일이니까 .."
"그런데 신기한 것이 딱 한가지가 있다."

"그게 뭔데?"
"오빠 사건들은 전부 다 여자들이 얽혀있네."

"그게 .. 그런가?"
"오빠는 오늘부터 내 관리 대상, 연구 대상이야. 알았어?"



나는 권혜주에게 계산을 하러 갔고, 지혜는 또 팔짱을 껴온다.





=*=*=*=*=*=*=*=


이번 얘기는 엄청 길기만 하고 알맹이는 없었죠?
뭐 .. 얘기가 전개되다보면 이렇게 되는 일은 간단하게 쓸 수도 있는데,
저는 주저리주저리 다 쓰고싶어서 그냥 썼어요.


그런데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소라 소설의 "금주의 주목할 만한 신인"에 "Jadore 의 알바"가 있네요.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분 독자님들게서 성원해주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건 그거고.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저에게 응원해주시느라고
한줄의 댓글을 남기시고, 또 추천 한방을 눌러주신 여러분들게 감사드려요.
이번 주말 롯도에 꼭 당첨되시길.
만일 안되면 나이트에 가서 부킹이라도 성공하시든가. .. ㅋㅋ
그것도 안되면 .. 흠.. 건강하게 오래 사시고 돈 많이 벌어서 부자되세요.
또 Ja"dore 의 글도 많이 읽어주시고...


- Ja"d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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