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이린의 감시 & 윤기숙
나는 계단으로 해서 내 텔로 돌아왔다.
뺨에는 지혜가 입술로 누를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입술에는 지혜가 내 입술을 흥건하게 적시면서 빨려 들어가던 느낌이 아직도 느껴진다.
지혜가 계단에서 갑자기 나에게 했던 키스를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흔든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직 18살밖에 되지 않은 미성년자를 어쩌겠다고?
원조교제도 아니고 ..
그렇지만 18살 먹은 여자애가 나에게 키스했다는 사실.
두근두근.
지혜에게서 카톡이 온다.
"오빠, 졸려?"
"여신이 그렇게 했는데 어떻게 잠이 와?"
"잘 자라고 뽀뽀 해준건데?"
"거짓말. 여신 생각하면서 잠자지 말라고 그런 것 같은데"
"처음에는 뽀뽀만 하려고 했는데, 오빠 입술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지혜에게 나쁜 생각이 없는 것을 내가 알거든. 그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줌."
"그럼 다음에 또 해도 돼?"
"야! 별 변태같은 생각 고만하고 빨랑 자고 내일 공부 빡씨게 하자."
"알았어. 그런데 나 오빠한테 잠시 올라가도 돼?"
"왜?"
"아까 와인을 마시다 말았더니 자꾸 생각나고 잠이 더 안오네."
"너 벌써 술꾼이냐?"
"마시던 잔만 비우면 안돼?"
"내가 다 치웠는데?"
"그럼 딱 한잔만 더 ..."
"진짜 딱 한잔만?"
"진짜 딱 한잔만 콜."
"콜. 그 대신에 엄마 허락 카톡으로 받아 와서 보여줘."
"흥! 오지 말라는 말이네."
"뭐야? 난 분명 오라고 했는데?"
"그 허락 오빠가 받아주면 안돼?"
"난 지금 바쁘거든. 허락 받으면 들고 오고, 아니면 그냥 자."
그날 밤에 나는 수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밤 늦게 수희에게서 카톡이 왔다.
"일이 늦게 끝났어?"
"쫌 그렇네. 어머니 잘 모셔다 드렸어?"
"언니랑 형부가 고생했지. 나야 그냥 따라만 다녔고."
"오가는 것만 해도 엄청 피곤하겠다. 푹 쉬세요."
"자기도 잘 자고, 내일은 어떻게 해서든 함 보자."
"내일 일도 늦게 끝나."
"그럼 밤에 여기 와서 자고 내일 같이 출근하면 되겠네."
"내일 밤은 엄마한테 가서 자기로 약속했거든."
"그럼 나는? 자기 완전 나쁘네."
"미안해. 오늘은 그냥 자. 내일 연락할께."
"안하기만 해. 자기도 잘 자요."
수희와의 카톡을 끝내고 나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물줄기 아래에 서서 이런 저런 생각을 조용해진 지혜가 궁금해졌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아이린은 승낙했을까?
내가 아이린이라면, 내 딸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혼자 남자 방에 가서 와인 마시겠다고 하면 도저히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끼야악!"
지혜였다.
나는 재빨리 옷방으로 들어가서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지혜에게로 갔다.
지혜가 원피스바람으로 앉아있다.
"오빠, 미안."
"너도 참. 그렇다고 잠옷 바람에 오니?"
"급해서. 그런데 오빠꺼 중요한 부분은 보지 못했어. 걱정하지 마."
"웃겨. .. 거짓말 하지 마. 너 보는 것 내가 다 봤거든요."
"오빠가 빨리 돌아서는 바람에 못봤다니까."
"알았어. 그 얘기는 고만하고. .. 엄마 톡 보여줘."
"오빠, 사후 승인 제도가 어때?"
"뭐라고?"
"지금 말하면 허락할 리가 없잖아."
"그럼 오면 안되죠. 당장 내려갓!"
"빨리 한잔만 마시고 내려갈께. 내일 엄마한테 내가 말하면 되지?"
"완전 어이 상실이네."
"정부도 긴급한 사안은 먼저 처리하고, 나중에 국회의 승인을 얻는다는데?"
"이 시간에 여기서 와인 마시는 것이 긴급한 사안이냐?"
"잠을 못자겠는데 어쩌라고?"
"술 생각에 잠이 안오면, 넌 벌써 알코올 중독자니?"
"그게 .. 꼭 술 때문에는 아니고 ..."
"기다려. 어차피 열어 놓은 와인은 없으니까 새 병을 열어야 하거든."
"음.. 그럼 그냥 맥주로 할까?"
"와인이랑 섞으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맥주에서 와인은 위험해도, 와인에서 맥주는 괜찮을껄?"
"쪼끄만게 아는 것은 많아요."
나는 냉장고에 있는 캔을 두개 꺼내서 잔과 함께 소파로 가져왔다.
지혜는 아까 아이린이 식탁에 덮어둔 안주를 들고 왔다.
나는 캔을 열어서 두 잔을 채웠다.
"건배."
"건배."
지혜가 몇모금을 마신다.
아마도 갈증이 심했었나보다.
입 언저리에 맥주 커품이 묻어있다.
나는 물티슈 팩을 지혜에게 건네주면서 지혜의 입술을 가리켰다.
"싫어."
지혜는 물티슈를 받 지않고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일 만일 수희의 입이라면 ...
음란한 생각이 내 머리 속을 회오리바람처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런데 지혜의 입술이 내 입술로 왔다.
"오빠, 미안해."
지혜는 서너번 쪽쪽 소리를 내면서 내 입술에 키스했다.
이제 내게는 온 몸에 짜릿짜릿한 것이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
나는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 키스에 내가 반응할까봐 겁이 났다.
나중에는 지혜가 내 입술을 계속 빨면서 놓아주지 않는다.
지혜의 팔이 내 목을 감아온다.
나는 내 입을 간신히 떼어내면서 말했다.
"기왕에 할꺼면 깨끗이 씻고 나서 하든가."
"그래?"
지혜는 물티슈를 꺼내서 입 언저리를 닦는다.
그러더니 또 덤벼든다.
나는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봐주니까 자꾸 하려고 해?"
"씻고 하라며?"
"아까 한 것을 말한 읍... 으읍.. ..."
지혜는 내 입술을 계속 빨았다.
나는 참아야 했다.
상대방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고 또 아이린의 딸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또 내 입을 떼어냈다.
"지혜야."
"어?"
"다 컸구나. .. 남자랑 키스하고 싶어?"
"아니거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지혜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 꼬리를 내린다.
이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으며 깨물어주고 싶다.
"키스는 바로 섹스의 시작이야.
여자 입장에서는 남자를 향하여 몸과 마음을 여는 것으로 봐도 돼."
"와아. 오빠 완전 변태다."
"조용히 하고 내 말 들어.
저 남자가 너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또 너도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
이 두가지 사실에 대하여 확신이 서면 그 때 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나는 그게 아니고, 그냥 예쁘고 귀여우니까 ..."
"너는 길 가다가 예쁜 꽃이 눈에 띄면 무조건 꺾니?
예쁜 어린 아기가 유모차에 실려가면 무조건 덤벼들어서 키스하니?"
"그건 아니지.
오빠가 길가에 핀 꽃도 아니고,
유모차에 실려가는 아기도 아니거든."
"됐으니까. 오늘은 내가 없던 일로 해준다.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화낼꺼야."
"오빠는 이상해."
"내가 왜?"
"내 친구들은 남자 대학생들이랑 사귄다는데, 오빠는 .."
"너도 나랑 사귀고 싶어?"
"......"
"나는 그런 나이 어린 대학생이 아니고, 군대를 제대한 어른이거든요."
"남자들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이 어린 여자가 더 좋다는데, 오빠는 아니야?"
"넌 어디서 그런 이상한 얘기들만 들어?
네 주변 정리 좀 해야할 것 같다.
그런 남자들은 아무래도 루저들이 아닐까?
자기 나이에 있는 여자들은 넘사벽이라서 도저히 어떻게 하지 못하거든.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고, 대갈통에 든 것은 똥밖에 없고 ...
돈을 급하게 필요로 하는 나이 어린 여자애들을 돈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변태들.."
"그럼 오빠는 나처럼 나이 어린 애들은 눈에 안들어와?"
"응."
"칫."
"남자들은 해야 할 일들이 많아. 그런 많은 일들을 하다 보면 성공보다 실패를 훨씬 많이 경험하거든. 또 그만큼 불안하고 또 허무하기도 해요. 그래서 남자들은 다른 수컷 동물들하고 똑같아. 허무감과 불안감 때문인지 정액을 더 많은 여자들에게 뿌리려는 마음이 강해. 자손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으니까."
"흐으음. 그럼 여자는?"
"여자는 그게 아니야. 아무 남자의 정액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야. 자기 나름대로 남자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미달되는 남자들은 걸러낸대요. 자기 몸에서 생기는 자손은 우수한 품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이 아닐까?"
"남자는 되도록 많이, 여자는 가능한 한 우수하게, 뭐 이런거네?"
"이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하는 생각이야."
"아니야. 그럴 듯 해. 앞으로 열성은 거부하고 우성은 받아들여야겠구나. 하하하."
"그건 네가 의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본능에서 너도 모르게 그렇게 이루어진다니까."
"그래서 여자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가 다 다른건가?"
"여자의 약점이 다르듯이, 자기가 보는 남자의 강점도 다를테니까."
"그럼 나한테는 오빠가 완전 딱이네?"
"그건 말이 안돼."
"뭐가 말이 안돼? 내 눈에 보이는 오빠는 완전 우성이거든."
"왜 너랑 비슷한 나이의 남자를 생각하지 않고 나한테 뎀비냐?"
"오빠는 이런 얘기를 다 어디서 들었어?"
"심리학이라는 과목이 있거든. 그거 하다 보면 다 배워."
"심리학?"
"또 문화인류학이라는 학과에서도 배우고."
"와아. 그럼 나는 지금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내용을 오빠한테 들은 거야?"
"지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이야기한 거죠."
"오빠가 나한테 엄청 쉽게 말하는데, 오빠는 나를 완전 짱돌인줄 알고 있나봐?"
"그럼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 할까? 하하."
나는 지혜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지혜는 그 큰 눈을 깜박이며 재미있다는 듯이 열심히 듣는다.
"그러니까 내 결론은, 나한테 키스하려고 덤벼들지 말라고. 알겠지?"
"그래도 내가 덤비면 어쩔껀데?"
"내 힘으로는 안될 것 같고, .. 나로서는 지혜네 엄마한테 도움을 청해야죠."
"완전 치사하네."
"네가 안덤비면 나도 완전 젠틀이거든?"
"하기사... 내가 오빠라도 그러겠다."
이제야 사랑스런 지혜랑 말이 좀 통하는 것 같아서 속이 후련하다.
그런데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 섭섭한 것도 있다.
지혜는 두 캔을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도 방문 앞에까지 데려다 주려고 지혜를 따라서 일어섰다.
우리는 계단을 걸어서 내려갔다.
나는 앞장서고 지혜는 애 뒤를 따라서 걸어 내려온다.
나는 계단의 끝까지 모두 내려갔다.
그런데 지혜가 갑자기 나를 부른다.
"오빠!"
"어?"
나는 대답하며 뒤로 돌아섰다.
지혜가 쓰러지듯이 내게 안겼다.
나는 얼떨결에 지혜를 받아 안았다.
"발목 삐끗했어?"
"아니."
지혜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
이제 지혜가 이러는 것에 나는 조금도 이상해지지 않는다.
지혜가 한 쪽 다리로 내 허벅지를 감고 은밀한 부분을 내게 완전히 밀착시켜서 비빈다.
나는 순간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오빠는 발기도 안해?"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우리도 학교에서 성교육 배우거든요."
"남자는 아무 여자나 막 발기한다고 배우니?"
"건강한 남자는 그렇다던데?"
"그럼 나는 건강한 남자가 아니라는 얘기네."
지혜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로 나갔다.
나도 계단을 올라와 내 침대로 가서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 순간에 지혜의 말대로 발기라는 것을 해주지 않은 나의 이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완전 뒷북을 친다.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 듯 발기하는 것이다.
=*=*=*=
다음날 아침에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은 지혜였다.
엄마가 자기 방으로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면서 내 입술에 키스하고 도망친다.
지혜를 그냥 이대로 두면 지혜에게 습관될 것 같다.
그런데 기분은 좋다.
"으으. 변태자식"
나는 혼자 생각하고 양치하고,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었다.
시계를 보니까 벌써 9시가 되고 있다.
옷을 갈아입고 지혜 방으로 내려갔다.
"오빠, 아침부터 나 운동하는 것은 좋은데, 전화를 받으면서 자든가 .."
"형, 내가 올라간다니까, 누나가 나를 꼬집으면서 못 가게 하고 자기가 갔어요. 하하."
우리는 모두 모여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아이린은 가끔씩 식사를 멈추고 식탁을 둘러보는 척 하면서 나를 본다.
아이린의 얼굴에는 웃는 표정이 떠나지 않는다.
"지혜가 어제 밤에 선생님을 귀찮게 했죠?"
"그런데 심각. .."
"내가 한 그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정도니까 엄마는 신경 꺼도 돼요."
지혜는 재빨리 내 말을 끊고 자기가 할 말을 해버린다.
나를 보더니 윙크를 살짝 한다.
식사가 긑난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지혜와 경식이에게 공부할 준비를 해서 30분 후에 내 방으로 올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내 방으로 올라와서 샤워를 하고 애들을 기다렸다.
드디어 경식이가 먼저 올라오고 나중에 지혜도 도착했다.
아이린도 처음에 지혜와 같이 들어와서 음료수와 간식을 챙겼다.
그런데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무슨 책을 읽고 있다.
지혜는 주방 쪽에 있는 내 식탁에, 경식이는 창가에 있는 내 책상에 앉게 했다.
우리는 10시에 공부를 시작했다.
점심식사는 오후 2시로 정했다.
나는 두 애들 사이를 번갈아 오고가며 얘네들이 퍼붓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아이린과 경식이가 있어서인지 지혜는 많이 조심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내가 옆에서 설명할 때에는 은근히 내 팔에 기대보기도 한다.
다리로 내 다리를 비비기도 하고.
한번은 그러는 것을 아이린이 곁눈질로 봐버렸다.
아이린이 가만히 넘어가주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허엄. 험. .."
지혜가 깜짝 놀라면서 자세를 바로 한다.
아이린이 나에게 와서 내 전화기를 내 앞에 놓고 갔다.
"진동 소리가 났어요."
그러나 전화도 문자메시지도 온 것이 없다.
지혜 때문에 아이린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는 지혜의 연습장에 적었다.
"엄마가 봤거든."
지혜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경식이도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공부를 그렇게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둘 다 차분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이다.
아이린은 중간에 PC방에 갔다온다면서 30분 정도 자리를 비웠다.
아이린이 오후 2시가 되자 우리에게 물었다.
"2시네. .. 우리 점심 뭐 먹을까?"
얘들은 소파로 가서 엄마의 왼쪽과 오른 쪽에 앉아서 엄마의 팔에 매달린다.
그들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다.
"피자."
"치킨."
"순대."
"닭강정."
"불고기."
"돈가스.
"요것들이!"
"엄마. 나나 경식이 공부하는 것 직접 보니까 기분 좋지않아? 오늘 처음 봤지?"
"좋지. 좋고 말고.
그걸 말이라고 해?
나. .. 지금 엄청 행복하거든.
오늘 내 눈으로 직접 보니까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 방을 나가기가 싫을 정도야."
"엄마, 그렇게 좋으시면 쏘시죠? 헤헤."
"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그 많은 것을 한꺼번에 어떻게 다 먹는대?"
"지금이 우리 한참 클 때야. 없어서 못먹지."
"엄마, 오늘 이 아들 공부하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어때?"
"우리 경식이가 엄청 으젓하고 믿음직스럽고,
선생님 설명하시는 것을 열심히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면,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푸욱 놓이고, .."
"그럼 나는?"
"우리 지혜는 약간 걱정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
"뭐야아. 여기서도 남아선호네?"
"넌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해."
"참나. .."
"아무튼 순대랑 닭강정 그리고 김밥이다."
"앗싸아아."
애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잡는다.
나는 혹시 얘네들이 게임에 접속하는가 하고 긴장했다.
그러나 둘 다 유투브에 떠있는 것을 들여다본다.
아이린은 음식을 전화로 주문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와서 나에게 커피를 따라주었다.
"태현씨는 애들이 물어보면 무슨 과목이든 다 대답해줄 수 있는 것 같던데요?"
이때 지혜와 경식이도 식탁으로 온다.
경식이는 엄마 옆에, 지혜는 내 옆에 앉는다.
"나나 경식이가 뭐랬어? 우리는 오빠가 하라고 시키는 것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해야하는 공부를 우리가 스스로 공부하고, 오빠는 우리가 무엇을 공부하든 도와주잖아? 싸구려 과외쟁이들이 이런 것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게. 괜히 깎아달라고 했네."
"뭐야아? 수업료를 깎았다고? 하하하. .. 누나, 들었어?"
"아휴. 돌겠다."
"엄마, 깎을 것을 깎아야지!"
"엄마 때문에 쪽팔려서 오빠한테 수업 못받겠다."
"누나. 당장 아빠한테 전화해서 엄마가 수업료 깎았다고 말해. 하하하."
아이린이 울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이제는 내가 교통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왔으니까, 너희들이 무엇을 배우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야. 그렇지만 나라고 해서 그것들을 지금까지 전부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 그게 벌써 몇년 전 얘긴데?"
"기억 못하면 어때? 형은 그것을 다시 검색할 수가 있잖아. 그게 어디야?"
"조용히 해. 내가 말하는 중이야. 엄마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큰 돈을 지불해야하는 입장이니까, 당연히 싸게 해달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꼭 아빠한테 말할 필요 까지 있어?"
"형. 내가 학교에 가서 애들한테 우리 엄마가 과외비 깎았다고 하면 애들 배잡고 넘어갈껄. 하하하."
그런데 지혜는 소파에서 벌써 아빠와 통화중이다.
아이린은 그 전화기를 뺏어들고 내 옷방 쪽으로 갔다.
지혜가 내게 말했다.
"오빠, 미안해. 진심이야."
"누나, 내 진심도 같이 전해."
경식이는 아빠와 통화중인 엄마에게 갔다.
지혜는 이 틈을 타서 내 뺨에 뽀뽀한다.
"불쌍한 오빠, 기분이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까?"
"나, 그런 것 전혀 없거든요."
아이린은 우리 앞에 앉는다.
"이건 뭐. .. 갑자기 내가 엄청난 죄인이 됐네."
"나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뭐 대단하기라도 한 것처럼 .."
"오빠 정말 대단하거든요. 대한대생도 그냥 대한대생이 아니라 과학고 출신이잖아."
"과학고 출신이었어?"
"아휴. .. 엄마, 차라리 말을 말자."
"참나. .."
"참나라니? 엄마는 무엇을 한 줄 알기나 해? 다른 집에서는 더 얹어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 푼수 엄마는 깎으면서 우리한테 잘해줄 필요가 없다고 해버린 거 아냐? 알기나 해?"
"이제 그 얘기는 고만하기로 하죠?"
"오빠, 걱정 마. 우리 아빠가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지 않을꺼야."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때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나는 계산을 하고 음식을 식탁으로 가져왔다.
지혜는 식탁을 치우고, 아이린은 식탁에 음식을 늘어놓고 먹을 준비를 한다.
나와 아이린은 커피만 마시며 애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지혜가 내 입에 순대를 넣어주려고 덤벼들었다.
그바람에 나는 커피잔을 들고 소파로 도망쳐야 했다.
나는 순대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4시가 돼서 우리는 두번째 타임을 시작했다.
아이린은 지혜를 감시하고, 지혜는 틈을 노려서 도발하고 ...
그러다가 들키면 아이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아. .."
저녁 7시가 되어 우리는 공부를 끝냈다.
내게도 난처하고 골치아팠던 상황이 드디어 종료가 된 것이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홀가분하다.
경식이와 지혜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아이린도 PC방에 간다고 나갔다.
나는 그제서야 전화기를 열어보았다.
부재중 전화들이 여러 개 있다.
엄마, 수희, 친구들 등등 몇 개가 눈에 띈다.
그런데 오하영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있다.
오하영은 한철수의 여친이다.
오하영과 한철수는 같은 과 후배들이고, 같은 동아리 멤버이고, 지금 2학년이다.
오하영이 무슨 일로?
나는 오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바빠요?"
"이제 막 끝났어. 무슨 일이신가 궁금하네."
"궁금하면 맥주 사세요."
"누구누구 있어?"
"철수랑 기숙이도 같이 있어요."
"어딘데?"
"학교 앞에 <한림>에 있어요. 오빠 오실 수 있으시면 지금 오세요."
"걸어서 15분."
"콜."
윤기숙은 오하령의 단짝이다.
나는 경양식집 한림으로 향했다.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아이린을 만났다.
"어디를 이렇게 바쁘게 가요?"
"학교앞에. 후배들이 보자네."
"물론 여자겠지? 늦겠죠?"
"글쎄. 별 일 아니면 일찍 오고. 내일 아침에 출근도 해야하니까."
아이린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지나가는 택시에 탔다.
아이린은 지혜에게 싫은 소리를 약간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하영은 얼굴은 별로지만 몸매는 제법 되는 것 같다.
옷도 몸에 붙는 것을 입고 불편하다고 투덜대는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술을 제법 많이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성격도 좋은 편 같다.
윤기숙은 오하영과 함께 딱 한번 만났는데, 얼굴이 청순가련형이고 제법이지만, 몸매는 티가 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오하령은 제대 하기 직전 마지막 휴가 나왔을 때 동아리 모임에서 처음으로 만났었다.
그 후로 두번 정도 더 만났던 기억이 난다.
<한림>안으로 들어서자 구석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형."
"오빠, 여기!"
기숙이는 혼자 앉아서 웃기만 한다.
하영이 옆에 앉은 철수는 벌써 혀가 구른다.
셋 다 얼굴은 붉다.
조명 탓만은 아니다.
나는 기숙이 옆 자리로 앉았다.
"형, 저녁?"
"괜찮아. 맥주만."
"알아요. 오빠는 500짜리 딱 한잔으로 끝까지 쭈우욱. 하하."
"언제부터 마신 거야? 무슨 일 있어?"
"우리 이번 주에 중간고사 다 끝났잖아."
"형. 역시 이번 시험에서도 내 인생은 씁쓸해요."
"자일리톨 씹으면 되는데."
"썰렁이거든요."
"자일리톨 대신 오빠야."
"뭘 망쳤는데?"
"공업수학, 일반물리학."
"저런, 작년에 놓쳤구나."
"재수강인데도 여어엉. .. 형, 어떻게 안될까?"
"오빠, 이거 우리 이번이 마지막이야."
"시험 전에 족보 안돌았어?"
"교수가 완전히 새로 바뀌는 바람에."
"재수강 괜히 한 것 같아."
"지인짜. 이러면 술 맛 안나서 못마시는데."
"형, 500 한잔은 이러나 저러나 비워야죠. 남자 체면이 .."
"오빠, 맨정신으로 말하니까 이상하죠? 일단 잔부터 비우세요."
"맞아. 형은 술이 들어가야 대화가 통하더라. 하하."
이건 뭐. ...
고딩 과외에 대딩까지?
얘네들에게서 돈은 받지 못한다.
그냥 선배로서 후배들을 위한 찬조출연일 뿐이다.
이 일을 어쩐다?
오하영이 윤기숙에게 말했다.
"기숙아. 아무래도 네가 오빠를 구슬러야 할 것 같다."
"얘는? 난 아직 .."
"저 오빠 여친이 지금 캐나다에 있는데, 공대 퀸이었대. 너도 이번에 퀸 될 꺼 확실하잖아?"
"아이 참. .."
아야기나 술판은 오하영이 주도했다.
어느새 나는 윤기숙이 권하는 두번째 잔을 마시는 중이다.
철수와 하영이 입맛을 다신다.
"형,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오빠한테 바로 기숙이였구나."
"그럼 날더러 어쩌라고?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기숙이가 엄청 곤란해 할 것 같은데?"
"제 체면 살려주셔서 엄청 고마워요. 하하"
"그럼 기숙이한테 목매려고 하는 규식이오빠는 어쩐대?"
"야아! 이 자리에서 그 왕변태 얘기가 왜 나오냐?"
"두번째 잔 이만큼 마셨으니까 이제 일어나자."
"형, 바쁘세요?"
"내일 아침에 출근해야지."
"뭐야? 오빠도 알바 다녀?"
"아직 팔다리가 멀쩡한데, 기초생활 수급자를 할 수는 없잖아?"
"돌겠네."
"그럼 어쩌지?"
"다음에 전화하자."
"오빠, 나도 오빠한테 전화해도 돼요?"
"대출받으라는 전화도 받는데, 기숙이 전화는 받으면 왜 안되냐?"
나는 내 전화기를 윤기숙에게 건네주었다.
오하영과 한철수는 내게서 확답을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나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제 정말 가지?"
"오늘 술값은?"
"하영이가 나보고 내라던데? 얼마나 마셨어?"
"이거는 우리가 저녁 먹은 거니까 각자 낼꺼고, 오빠는 이거랑 이거 내주시면 고맙죠. 헤헤"
오하영의 넉살에 나는 5만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기숙도 따라서 일어선다.
오하영의 커다란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어머머. 정말? 너 태현오빠 따라갈꺼야?"
"형. 둘이 진짜야?"
"그럼 날더러 너네 둘 사이에 얼마나 더 끼어있으라고?"
"기숙이가 설움을 쫌 겪었구만."
"하아. 말도 마세요. 지긋지긋했어요. 하하. .. 오빠, 나도 따라가도 되죠?"
"그래, 나가자."
"형!"
"오빠!"
"얘들이 도대체 왜 이래?"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두고 우리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밖으로 나온다.
기숙이는 <한림>을 나오면서 내 팔짱을 낀다.
그런데 내 팔에 묵직한 느낌이 온다.
나는 멈춰서서 철수와 하영이를 기다렸다.
"왜요?"
"아마 곧 나올꺼야."
잠시 후에 두 사람도 나왔다.
오하영은 우리를 보더니 진짜 완전 호들갑이다.
"어머머. 벌써 팔짱까지? 어쩜."
"하영이 숨 막히겠네. 하하."
"짝은 따로 있었던거야? 우리 몰래 그동안 둘이 따로였어?
오빠, 어떻게 그럴 수가? 철수야. 뭐라고 말좀 해봐. 이거 완전 기가 막히지 않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난리야?"
"오빠, 정말 몰라서 물어요?"
"난 알면 안물어. 모르니까 묻지."
"아니야. 아무래도 다 알면서 내숭 같아."
"에이. 기숙아, 그냥 가자."
"하하. 그래요."
"어디로 가고 싶어?"
"신촌요. 영화보러 가요."
"어머머. 어쩜. 어머머."
이 때 택시가 와서 손님을 내려놓았다.
나와 기숙이는 그 택시의 뒷자리로 탔다.
기숙이는 택시 기사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 나에게 물었다.
"쟤네들 같이 안가요?"
"나 쟤네들이랑 별로 안친하거든. 기숙이가 알아서 해."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야, 오하영. 안타?"
"타도 돼? 헤헤."
하영이는 기숙이 옆에, 철수는 기사 옆자리에 앉았다.
철수가 기사에게 신촌으로 가자고 했고, 기숙이는 하영이에게 말했다.
"이 시간부터 너희 둘이 우리 둘 사이에 끼는 거다. 알았니?"
"혼자 아니고 우리 둘이 같이 끼면, 별로 서럽지 않을껄?"
"그래? 오늘 함 당해봐."
"소름 돋네. 아니. 우리 때문에 맺힌 것이 제법 있나봐?"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있었냐고?"
"뭐야?"
"툭하면 물고, 빨고, 안고, 쓰담쓰담하고 .. 나 완전 토나오고 암걸리는 줄 알았거든?"
"이러언."
"오빠, 그 동안 내가 겪은 것 전부 다 되갚아요. 콜?"
"그래. 기숙이 맘대로 해."
"돈이 쫌 들면 어떻게 해요?"
"돈? 내 카드 줄께. 기숙이 맘대로 써버려."
"와아. 울오빠 완전 짱이네."
"와아. 이 황당시튜는 도대체 뭐야? 시트콤도 아니고."
기숙이는 내 팔에 팔짱을 끼면서 내 팔을 자기 가슴으로 당겨갔다.
역시 묵직한 느낌이다.
그런데 왜 물컹이 아니고 묵직이지?
택시가 멈추자 뒷자리에 있는 우리는 우루루 내렸다.
철수가 내리려고 뭉기적대자 기숙이가 철수에게 말했다.
"흥! 택시비는 내고 내려. 오빠, 우리는 가요. 하하하"
"야아! 저게."
"따라 오려면 택시비 정도는 내야 하는 것 아냐? 하하하"
"완전 낚였다."
"형. 이건 쫌. .."
오하영과 한철수는 투덜거리면서 택시비를 냈다.
우리는 극장이 있는 백화점 앞에 섰다.
"우리 사귀는 기념으로 오늘 이 영화 볼꺼거든. 그런데 철수가 맛이 간 것 같다, 어쩌지?"
"기숙아. 이건 19금..."
"그럼 우리가 미성년자냐? 민증 까라면 까면 되지."
"나? 하나도 안취했는데?"
"한철수! 시끄러웟! 나 지금 엄청 부글부글이거든요!"
"그럼 너네는 알아서 놀아야겠다. 하하. 오빠, 우리 들어가요."
"형. 정말 이 야한 영화를 기숙이랑 본다고?"
"기숙아. 너 진짜 이럴래?"
하영이와 철수의 찡그린 얼굴을 뒤로 하고 기숙이는 내 손을 잡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면서 기숙이가 하라는 대로 했다.
나와 기숙이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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