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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7 1,266회 0건





9. 칠구 육십삼, 팔칠 오십육, 안틀리거든? 내가 왜 취했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난 번에 왔었던 이탈리아 식당이다. 최수희는 와인을 마시겠다고 했고, 둘이 피자 한판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왠지 최수희가 오늘 무슨 일을 내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 보인다.



"누나, 삼겹살 집에서는 소주, 노래방에서는 맥주, 여기서는 와인. 괜찮겠어요?"
"소주는 세잔, 맥주도 딱 두잔 그게 다인데 뭐가 걱정되니?"

"나중에 누나가 정신을 잃는 일이 일어나면 .."
"내가? 그럼 우리 집에 데려다 놔. 산당동 미래아파트 34동 2402 됐어?"

"내가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문자로 날려."
"콜."



오똑 솟은 콧날이 검은 눈매와 함께 예쁜 얼굴이다. 시원스럽게 뻗어 내린 목과 여성스러운 가슴은 앉은 자세에서도 돋보인다. 최수희에게서는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환자처럼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건강함을 발산하는 갈색이나 구릿빛이 훨씬 더 현실적이어서 좋아하는 편이다. 최수희는 옅은 갈색톤이 나는 피부이다.

나는 아직 절잔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최수희는 벌써 첫번째 잔을 비웠다. 내가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는데, 바로 또 두번째 잔을 마시기 시작한다.



"누나,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체해요."
"하하하. 와인 마시다 체해? 또 여기서 나를 웃기려고 그래?"

"그건 농담이고, 누나 취할 것 같아."
"내가 취해? 걱정 붙들어 매셔. 취하면 어때? 우리 막내가 든든하게 나를 지키고 있는데."

"그래도 술에 취하면 쫌 .."
"아무래도 볼상 사납겠지? .. 그래도 기분은 쪼끔 좋네."

"왜? 뭐가?"
"우리 막내가 나를 걱정해주니까. 헤헤."

"그럼 많이 좋아야지 왜 조금만 좋아요?"
"오늘처럼 엄마가 안계시면 퇴근하고 나서 뭔가 마음껏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안계셔도 기껏 하는 것이 막내랑 와인 마시는 거잖아?"

"어이구. 누나가 남자 생각이 나는구나. 아무래도 소개팅에 나가야겠다."
"소개팅? 그게 어디 한번으로 성과가 있니? 그런데 어쩐대?"

"왜?"
"나는 실속 없는 소개팅보다, 이렇게 막내랑 앉아서 와인 마시는 것이 훨씬 좋거든. 하하."

"누나, 내 생각은 안해? 누나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막내 생각? 왜? 이렇게 예쁜 누나랑 와인 마시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라도 있어?"

"나도 영양가 있는 여자를 만나야 할 것 아냐?"
"너, .. 전에 나한테 여친 있다고 안했나?"

"있어도 외국에."
"너도. .. 그 나이에. .. 딱하다.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니구만."

"누나 두번째 잔이 비었어. 내 걱정할 때가 아니야."
"나, 오늘 오래 만에 자유의 여인인데, 좀 취하면 안될까?"

"어? 그래. 취해.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취해. 그럼 나는 도망칠꺼야. 하하."



그 동안 최수희가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다고 했다. 최수희가 한없이 존경스럽다. 마치 내가 최수희의 엄마이기라도 한 것처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요새 저 나이에 어떤 여자가 노인 병수발을 한단 말인가? 아마도 나이팅게일도 못하겠다고 내던질 것이다.

나는 군에 가기 전에 할머니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겪었던 고충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도 엄마와 아빠는 마지막까지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 모셨었다. 엄마도 회사에 다니므로 집으로 요양사를 부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아빠 모르게 흘렸던 엄마의 눈물, 엄마 모르게 답답해하던 아빠의 심정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최수희를 범상치 않게 생각한다. 총무과에서도 다섯명의 여자 모두가 최수희를 착하다고 칭찬하느라고 바쁘다. 내가 만일 결혼을 한다면, 아마도 최수희 같은 여자랑 결혼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자는 찾으면 분명 없을 것이다. 세상 일이 생각대로 딱 맞아떨어지면 누가 살기 힘들다는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내 마음에 깊이 숨겨두고 싶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최수희가 몰랐으면 한다. 내가 회사에 나가서 최수희와 같이 일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고마워할 것이다. 그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나 혼자만 갖고 싶다. 먼 훗날 우리가 어디선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반갑게 대해주고 싶다. 내 기억에 오래 동안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을 여인으로 지금 만나고 싶은 것이다.

최수희에게 오늘은 분명 자유의 날이다. 그러면 오늘은 취하도록 마시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무슨 권리로 막겠는가? 오히려 도와주고, 지켜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망치겠다는 말은 물론 농담이었다.

갑자기 최수희가 나를 불렀다.



"막내야."
"누나, 왜 그래?"

"얘가 갑자기 사람을 살살 녹이네."



그런데 최수희는 말을 하지 않고 와인을 마신다. 생각해보니까 아까부터 나는 자꾸 최수희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최수희를 쳐다보면서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우리 막내. ..."
"왜 그러세요?"

"너 참 .. 보면 볼수록 좋은 남자야."
"참나. .. 얼마나 겪어봤다고?"

"5일. .. 그걸로 이미 충분했어."
"아무튼 고맙습니다. 헤헤"



그녀는 갈증이 난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와인을 마신다. 위험수위에 점점 도달하는 것 같다. 아직은 최수희의 혀가 구르는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서 흐트러짐이 나타난 것도 아닌데, 최수희가 하는 말 때문에 나는 은근히 긴장된다.



"여친, 언제 온대?"
"몰라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잘 안돼? 삐거덕 거려?"
"우리 지금 같이 있지도 않거든요.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겨요?"

"몸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마음도 멀어진 거야?"
"에이. 누나, 이제 그 얘기는 고만하세요."

"그럼, 내년 봄에 학교로 복학하면 우리랑도 끝이네?"
"별 일이 없으면 그렇지 않을까요?"

"그게 좋으니? 만나고 헤어지고 ... 그런 것이 반복되는 것이 좋아?"
"좋고 싫고가 있어요? 사람 사는 것이 그런 것 같은데."



최수희의 잔이 또 입으로 간다. 나는 말릴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최수희가 보면 볼수록 예쁘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내가 최수희에 대하여 그녀의 착한 심성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외모가 어떤 매력을 갖고있기 때문일까?



"그럼 말이야 ... 막내야."
"누나, 답답하게 질질 끌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을 해보세요."

"우리 막내.. 혹시 나랑 연애할 마음 없어?"
"뭐야? 누나, 술취할 꺼라고 내가 말했지?"



나는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최수희가 술에 취해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술이 들어가니까 허전하고 외로운 건가?




"칠구 육십삼, 팔칠 오십육, 안틀리거든? 내가 왜 취했냐?"
"그런데 무슨 연애 얘기를 해?"

"누나 싫어?"
"누나는 누나야."

"하아. .. 그렇겠지. .. 막내가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년이랑. .."
"누나! 왜 또 그런 소리까지 해?"

"결혼해서 같이 살자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몇 달만 사귀자는데, 그 말 했다고 나를 취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냐?"
"누나. 누나가 왜 누나인줄 알아?"

"여자고 또 연상이니까 내가 누나지."
"그럼 앞으로도 계속 누나잖아?"

"그런데? 그게 왜?"
"날더러 어떻게 누나인 여자랑 사귀란 말이야?"

"그럼 내가 너한테 더 이상 누나 안하면 되겠니?"
"그럼, 나이를 뒤로 먹기라도 할꺼야? 먹은 나이를 토하겠다는 거야?"

"오! 예에.. 이미 먹은 나이를 날더러 어쩌라고?"



최수희의 눈이 반짝인다. 반짝이는 것은 최수희의 눈물 때문이었다. 눈물 속에는 그 사람의 진심이 녹아있다고 어느 시인이 말한 것이 생각난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 모르겠다. 보고도 모르면, 보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내가 눈 뜬 장님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수정, 아이린 그리고 최수희. 최수희는 지금 눈물을 보이는 세번째 여인이다. 나는 또 마음이 먹먹하면서 울렁거린다. 이것은 분명 눈물울렁증 같다. 내가 이 눈물 때문에 이상한 결정을 함부로 해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마음이 갑갑하면서 화가 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나는 테이블에 있는 통에서 티슈를 꺼내서 최수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최수희는 티슈를 눈으로 가져간다.


"누나. 우리는 일주일에 5일을 만나서 같이 일하거든. 우리가 같이 있는 시간이 하루에 8시간이야. 하루의 삼분의 일이잖아. 이 정도면 사귀는 거나 뭐가 달라?"
"다르지. 달라도 한참 달라."


최수희는 화장실에 간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취해서 비틀거리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부축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는 그녀의 뒷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사히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먼저 나와서 화장실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취해서 화장실 안에서 뻗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걱정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하는 걸까? 최수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여자화장실에서 나왔다.



"자기, 나 기다린 거야?"



나는 처음으로 최수희의 입에서 막내 말고 자기라는 호칭을 들었다. 최수희는 내 손을 잡는다. 우리는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 와인 병이 비었다. 나는 한 병 더 주문했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지 않고 나란히 앉았다. 최수희가 자리에 앉으면서 내 팔을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자기야. 우리가 일하면서 만나는 것은 .. 뭐랄까 .. 우리가 영혼 없이, 회사의 부속품처럼,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가 나란히 있는 거야. 나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워. 만일 우리가 사귀게 되면,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 될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야. 내가 출근하면 돈이야 벌지만, 솔직히 나 그 돈 안벌어도 사는데 지장 없거든요."

"그래서 누나가 아까 팬티까지 벗었어?"
"그럼, 자기 머리에 다른 여자 팬티가 올라가는 것을 내 눈으로 어떻게 보라고?"

"눈물 난다."
"박대리는 원래 나혜지보고 팬티 벗으라고 했거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열받는 거야. 내가 엄연히 그 자리에 있는데, 왜 내가 안벗고 나혜지가 벗는데? 그래서 내가 입에 거품 물고 덤벼들어서 결국은 내가 벗었어."

"이거 참. .. 고맙다고 해야 하나 .."
"물론 여자 팬티가 깨끗한 것은 아니니까, .. 자기야. 엄청 미안해. 내가 자기 머리에 내 팬티를 씌워놓고, 나는 뭐 ..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아?"

"알았어. 누나 마음 알았으니까, 이제 고만 마시고 집에 가자."
"자기 대답은?"

"무..슨..대..답?"
"지금부터 우리 사귀는 거지?"

"콜."


나는 내 머리에 씌워졌던 여자 팬티에 그렇게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수희가 내 머리에 자기 팬티를 얹기위해 막후에서 그런 암투를 벌였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재주로 사귀자는 말을 거절하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만나는 범위는 출퇴근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그런데, 나중에 말하겠지만, 이것은 어디 까지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나는 우리 테이블을 계산했다. 최수희가 기겁을 한다.


"정직원이 알바생 피를 빨아먹어?"
"우리 사귄다며?"

“사귀면 자기가 돈 내냐?”
“응. 내가 돈 없으면 누나가 나한테 돈 줘. 돈은 항상 나만 낸다.”

‘‘이건 도대체 뭔데?”
“나랑 사귀는 것.”



내가 간단하게 이겼다. 최수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나가는 택시에 탔다. 최수희가 내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겨온다. 나에게 이러는 최수희가 3년이나 연상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택시는 마포대교를 건너서 여의도를 지난다. 최수희는 내 귀에 속삭였다.



"자기야. 나 자기한테 엄청 잘하고 싶거든. 어떻게 해야 해?"
"글쎄요. .. 나 바람피는 것 눈감아주기?"

"그거야 뭐. ..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자기는 학교에 다녀야 하니까."
"학교가 연애장이야? 그런데, 뭐라고? 우리는 복학 전에 끝난다며?"

"자기야. 그게 마음대로 될까? 하하."



택시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멈추었다. 나는 택시 요금을 계산하고 내렸다. 뒤따라 내리는 최수희는 약간 비틀거렸다. 나는 자동머신처럼 그녀를 당겨 안았다.

엘리베이터에 탁 24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몸을 가누기 못해했다. 나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가 이제 그 긴장이 풀리기 때문인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논스톱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최수희는 자기 집 앞에 섰다. 그녀는 나에게 생일이 몇월 몇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11월 27일> 이라고 대답했다. 최수희는 내게 명령했다.



"그거 눌러."




최수희의 도어락 비밀번호는 바로 내 생일이었다. 나는 눈물이 이미 왈칵 솟아나와 버렸다. 그렇지만 얼굴을 돌려서 들키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를 끌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서자 최수희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말짱했다.

나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최수희는 그야말로 바빴다. 커피머신에 커피를 얹고, 방에 들어가서 옷도 갈아입었다.

나중에 최수희는 내게 물었다.


"자기야, 나 하나도 안취했지?"
"택시에서 내렸을 때랑은 완전 다르네."

"그래야 자기가 여기까지 올라오지. 하하."
"당했네."

"와인 딱 두 잔만 마시자."
"왜 두 잔?"

"한잔은 어차피 뻥이잖아?"
"누나."

"누나 안한다니까."
"수희야."

"예."
"누나, 왜이래?"

"자기야. 적응해요. 다들 이렇게 하거든요."
"그래도 이건 여어엉."



최수희는 와인을 소파로 들고 와서 상을 차렸다. 우리는 건배하고 마셨다.



"아까 노래방에서 키스한 것. 자기 그거 진심이었어?"
"누나한테 허툴게 하면 혼날까봐 진심으로 했거든요."

"그럼 우리 그거 .. 지금 다시 하자."



최수희는 내 입술을 빨아들이지도 않고 다짜고짜로 혀를 내 입에 밀어 넣었다.



"아까 앞에꺼는 다 했잖아?"



- - - - - - - -


댓글 읽어보니까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나와요.

제가 뭐라고 이렇게 과분한 성원까지 해주십니까?

정말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드립니다.


- Ja"dore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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