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차 좀 따라가 주세요. 2만원 더 드릴게요.”
1시간 가까이 걸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지하철 신반포역 근처의 아파트 단지였다. 오늘이 일요일이 아니고 회사나 일하는 곳으로 갔다면 그녀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 좀 더 쉬웠을텐데... 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내려 113동 현관으로 들어가는 그녀 뒤로 바짝 따라 붙어 자동문이 닫히기 전에 같이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그녀가 11층을 누르는 걸 확인한 후 난 15층을 누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가 오른쪽 세대 현관 앞으로 걸어가 자동 도어락을 여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 있는 1103호 우편함을 살펴보았지만 비어 있어서 단지 정문 앞 상가 부동산에 가서 붙어 있는 매매정보를 보니 113동은 205㎡. 매매가 22억 ~ 26억.
1103호. 아파트 시세. 키 165~168cm,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글래머 스타일. 긴머리. 오똑한 콧날. 지적으로 보이는 차분한 눈빛. 약간 하이톤의 여성스러운 목소리 외에 이름이나 그 이상의 것들을 확인할 길은 없어 보여 공항으로 가서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갔다.
금요일 우연히 김유미와 통화를 한 후 주말을 꼬박 투자해서 이유성의 또 다른 여자를 한 명 알아내긴 했지만 난 아직도 오정희 쪽에서 시작을 해야 하는지 이유성을 쳐야 하는지 확실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첫 번째 기연이었고 하얀 원피스나 또 다른 여자의 스토리까지 알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 걸 알아내기 위해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 여수까지 다시 가서 하얀 원피스를 일산까지 쫓은 이유도 오정희를 압박해서 무언가를 듣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이유성 쪽을 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자.
내가 이유성이라면 어떻게 할까? 오정희와 호텔에 같이 있던 사진... 하얀 원피스의 여자와 같이 있던 사진... 그 것들을 들이대면서 하얀 원피스의 남편에게 털어놓기 전에 순순히 이야기 하라고 한다. 뭘?
오정희와 있었던 일을... 이 스토리는 이상하다. 돈을 요구한다면 가능한 설정이 되지만... 그건 오정희도, 하얀 원피스도, 이유성도 모두 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다.
10년 전 민현규에게 돈을 요구하는 척하면서 돌려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나름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지금도 오정희를 치는 게 가장 쉬워 보이지만 그녀가 이유성과의 관계를 부정한다면 내가 계속해서 밀어 붙이기가 난감해질 수도 있다.
정말 그럴까?
몇 달 전 난 김유미와 이유성의 정사를 우연히 목격하고 김유미를 몰아세운 후 그녀의 몸을 가진 적이 있다. 그 땐 김유미의 몸을 가지고 싶다는 내 욕정이 너무 강해서 앞 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때도 이런 저런 변수는 많이 있었다. 김유미가 술 취한 날 미친 사람 취급했다면... 갑자기 경찰을 불렀다면... 아니 내게 무슨 증거가 있냐는 식으로 따지고 들었다면... 그 상황도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유미를 가진 그 밤에 있었던 일들이 그다지 꼬이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이유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낯짝이 두껍지 않고는 오리발을 내밀기는 만만치 않을 정도로...
오정희로 돌아온다면...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 김유미 때와 다르다. 그리고 단 둘이 있을 만한 기회를 잡기 힘든 것도... 김유미 때처럼 ‘니 년과 니 아들 친구 놈이 붙어먹은 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어’라고 말한다면 통할까? 통할 것이다. 오정희는 주변의 누군가에게 그 말이 들어가는 것조차 겁낼 것이다. 그런데... 난 왜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건...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몸이나 돈을 노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겠다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 고작 둘 사이에 처음에 어떻게 된 거냐고 십년이 넘게 지난 일을 듣고 싶다는 게 협박의 이유가 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능할 수도 있다. 갑자기 괜찮은 시나리오가 머리를 스쳤다.
다음 날부터 난 다시 오정희의 주변을 배회하며 오정희의 식구들.. 천용호와 그의 부인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붙어서 그들의 직업이 무엇인 지 어떤 사람인 지 알아내려 애를 썼다.
천용호는 판교에 본사가 있는 유통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회사는 상품을 주로 인터넷으로 판매하지만 연 매출은 몇 백억에 달하는 상당히 탄탄한 회사였고 그의 부인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00도서관에 자원봉사 활동을 다니는 성품이 매우 착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주말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있었고 천용호와의 사이에서 이제 막 돌이 지난 것 같은 아이가 하나 있었다.
한 주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그 가족들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토요일 점심 무렵 임진각 주변에 있는 장어구이 집에 가서 다른 친지들 몇 분을 모시고 식사를 할 때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정희는 이 단란한 가정이 자신의 아들 친구이기도 한 이유성과의 밀회가 천용호나 며느리의 귀에 들어감으로써 흔들리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오정희의 뒤를 캐게 된 적당한 이유와 괜찮은 연기가 뒷받침 된다면 그녀를 독안에 든 쥐로 몰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고 있었다.
주중에 지연이 전화를 해서 안부와 언제 만날 수 있는 지를 물었는데 그녀의 말투가 상당히 밝았다.
“저에요. 이번 주말에 시간 어때요?”
“응? 일요일 날 시간 괜찮아. 어디서 볼까?”
“가까운 야외에 나가요. 날씨 좋대요.”
“응.. 어디 갈지는 정해놨어?”
“아무데나 가요. 아니... 아저씨가 알아봐요. 나 같은 미인한테 인터넷 검색하면서 그런 거 알아보게 하는 건 좀 잔인하지 않아요?”
“알았어. 그러지 않아도 알아보려고 했다구..”
“일요일 아침 11시까지 우리 집 앞에 와서 전화해요.”
“응...”
전화를 끊은 후부터 난 언제 오정희를 치러 가야하는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 부터는 당분간 회사 일이 바빠서 주중에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았고 여수호텔에서 오정희와 이유성의 사진을 찍은 후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당장 결행을 해야 했지만 지연 때문에 망설이게 된 것이다.
난 지연이 이렇게 빨리 이유성을 잊을 줄 몰랐다. 그녀 스스로 마왕을 지울 수 있다면 내가 오정희와 이유성의 과거를 알아낼 필요가 없어진다. 그건 지연의 우울증이 심해져 벗어날 수 없을 때를 대비한 안배였으니...
밝게 전화한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 결정하기는 너무 섣부른 판단이기는 하지만 오정희나 김유미는 지금 이대로 흘러가기를 원할 것이다. 난 지연의 회복을 위해 그녀들의 삶에 끼어들려고 할 뿐 그게 아니라면 굳이 움직일 필요도 명분도 없다.
전화를 끊고 아이들과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면서 그 날 저녁 오정희에게 가려고 했던 마음을 일단 접었는데 결국 그 망설임의 대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만만치 않게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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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난 지연의 아파트 앞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집으로 올라가 그녀와 커피를 마셨다.
“어디로 갈 거예요?”
“응... 그게... 야구장 가는 게 어때? 표는 예매해뒀어. 두산하고 LG 경기야.”
“정말이요? 내가 두산 팬 인거 어떻게 알았어요? 이야기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선승철은 LG 트윈스의 골수팬이었다. 지연과 선승철이 야구를 보러 가면 서로 다른 팀을 응원했을 듯...
“몰랐어. 마침 서울 라이벌 경기가 주말에 있어서... 날씨도 좋고 연휴라... 겨우 예매했어.”
“잠깐요... 그럼 유니폼 입고 가야지...”
조그맣게 콧노래를 부르며 방안으로 들어간 지연은 등에 31번 정수빈이 쓰여진 남색 두산의 유니폼과 하얀색 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가끔 TV에서 볼 수 있었던 미녀 야구팬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야? 두산을 좋아했던 게...”
“중학교 때 부터요. 처음 절 야구장으로 데려갔던 게 동네 친구였는데 두산 팬이었어요. 같이 응원하다가 보니 저도 그만... 실은 아직도 정확한 야구 규칙은 잘 몰라요. 그냥 좋아하는 거죠. 아저씨는 어느 팀이 좋아요?”
난 LG팬이지만...
“그냥 야구를 좋아해. 특별히 더 좋아하는 팀은 없어.”
시원한 맥주 캔 몇 개와 치킨, 김밥 등을 사들고 잠실야구장으로 갔다. 마침 예매한 표가 3루 측이라 두산 응원단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안타나 큰 타구가 나올 때마다 환호하며 시간을 보냈고 지연이 좋아하는 정수빈은 5회초 무사 1루에서 우전 안타를 쳐 3:2로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때까지 좋았던 두산 응원단 분위기는 7회말 1사 후에 LG가 연속 3안타와 폭투, 실책 등을 묶어서 3점을 낸 후 조용해졌고 9회초에 나온 정수빈은 다시 안타를 때려냈지만 마무리 봉중근에 막혀 결국 두산이 3:5로 졌다.
끝날 때까지 응원가를 목 터져라 따라 부르며 응원하던 지연은 경기가 끝나자 씩씩거렸다.
“6회에 연속 안타를 맞을 때 투수를 바꿨어야 했다구요. 7회에 점수만 안 빼앗겼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지연은 투수 교체 타이밍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6회 선발 김승회를 교체해 올라온 이혜천은 안타 2개를 맞았지만 실점하지 않았고 7회에 다시 올라왔다가 첫 타자까지는 잘 잡고 그 이후 연속 3안타를 맞으며 무너졌는데... 처음엔 야구 규칙도 잘 모른다고 하더니 투수 교체 타이밍이 늦어서 졌다니... 참 미스테리한 여자다.
인파 속에 섞여서 야구장에서 나온 후에 10여분을 걸어 두산 팬들이 주로 간다는 호프집으로 갔다. 술집 안에는 2001년 두산의 마지막 우승 당시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고 두산 유니폼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난 지연과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고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그래도 두산 팬들은 행복한 것 같아. 우승한 지는 꽤 됐지만 가을 야구는 단골이고 간간히 한국시리즈에도 올라가는 강팀이잖아.”
“SK 때문에 우승을 두 번이나 놓쳤다구요. 한국시리즈에서 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아픈 줄 아세요?”
“생각보다 두산을 많이 좋아하네. 지금까지 그런 말 한 번도 안했었잖아.”
“결혼한 이후로는 다른 데 별로 신경을 못 썼어요. 요즘은 그래도 TV로 자주 야구 봐요. 7회에 이혜천을 계속 기용한 건 실수라고요. 정대현이나 홍상삼도 있었는데... 아니면 노경은을 좀 일찍 냈었어도 됐구.”
규칙도 잘 모른다더니 투수들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난 맥주만 마시기 맹숭맹숭해서 소주를 한 병 달라고 한 후 타서 마시기 시작했다.
“지하철 타고 오니까 술 마시기는 편하네요. 호호.”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보기 좋네. 혼자 있을 땐 어때?”
“혼자 있기 싫은 건 여전해요.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만도 하구. 오늘 야구만 이겼어도 기분 완전히 업 되는 건데...”
“이혜천은 왼 손 투수면서 직구 스피드가 145km가 넘는 아주 매력적인 카드야. 2001년 두산 우승 당시 자기 역활을 100% 했었고 일본 가기 전에는 류현진과 방어율 1,2위를 다툰 적도 있어. 일본 다녀오고 나이가 들면서 직구 스피드가 전성기보다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6회에 연속 안타 맞았을 때 감지했어야 해요. 1점 차 승부니까 필승조가 나갔어야죠.”
“하긴 올해는 초반부터 두산 성적이 좋으니 감독 입장에서는 이혜천을 바꾸고 싶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 보면...”
“뭘요?”
“지금 두산의 분위기에서 이혜천만 좀 살아난다면 대권 도전도 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6회에 안타 두 개를 맞았지만 무사히 막고 내려온 베터랑 선수를 내리기 그랬을 거야. 금요일부터 LG와 3연전에서 이혜천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긴 몇 년 전만해도 이혜천 만큼 믿을 만한 카드도 없었는데...”
난 맥주 잔 안에 담긴 술을 한 잔 마신 뒤에 말을 이어갔다.
“이런 경우에 적당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다보면 질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승부가 있어. 지는 걸 알면서도...”
“무슨 말이에요? 질 걸 알면서도 승부를 해야 한다니...”
“응. 가끔은 그래... 사는 게 그렇더라고... 지는 걸 알면서도 승부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
“그게 언젠데요? 속 시원하게 말해줘요.”
“응? 글쎄... 내 경우를 이야기 한다기 보다는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야. 이 승부는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임하게 되는...”
“안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면 기세에서도 밀리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안하면 되는데... 그래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 승부에 지더라도 내가 왜 지는 지 이유를 알고 싶으니까...”
“실력이 떨어지니까 지죠.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요?”
“실력이라는 건 너무 넓은 의미잖아. 좀 더 디테일하게 알고 싶은 거지.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건지. 그런데 그 승부를 해서 졌을 때 잃는 게 너무 크다면 어떨까? 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
“글쎄요. 아무래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돌이킬 수 없다면...”
“주관적인 차이기는 한데... 생존의 문제가 걸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 눈물을 삼키면서 돌아서는 수 밖에... 어떻게 보면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작아지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니까.”
“그건 아저씨의 경험인거죠? 말해줘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 그 일은 떠 올리기 싫어. 그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라서...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그 정도였어요? 아저씨는 감정 같은 거 초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엄청 인간적으로 보이네요. 호호호.”
“잠을 못 잤었어. 한 동안... 악몽을 계속 꿨으니까...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회사 근처 슈퍼로 달려가서 소주 한 병을 나발 불고 나서 양치를 하고 입 냄새 제거하는 껌을 씹으며 직장 생활을 했고... 술 기운이 좀 떨어지면 다시 슈퍼로 달려가서 안주도 없이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고...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도저히 뭐요?”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도망치듯 승부를 피한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보여서...”
“우울증 같은 게 왔었나요? 저처럼?”
“그게... 글쎄... 뭐랄까?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생긴 홧병 같은 걸 거야. 그 게 더 가까울 것 같아.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다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지금은 괜찮은 걸 보면 그래도 극복한 거 아닌가요? 아직도 뭐가 더 남아 있어요?”
“그러게. 뭐가 더 남았을까? 지금 니가 보고 있는 겁쟁이 중년 남자가 아닐까?”
“아저씨가 겁쟁이라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난 살며시 미소를 띠며 지연의 뾰로통한 표정을 바라봤다.
“난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 그 땐 내가 지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으니까...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었다면 끝을 보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겠지. 그랬다면... 모르겠어.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지도... 도망치고 나서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위로 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 지는 이유를 모른다면 도망치는 게 옳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이렇게...”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더 궁금해지는 걸요? 언제쯤 이야기 해줄지는 몰라도 기다릴게요. 아저씨 마음이 더 편해지면 말해줘요. 그럴 거죠?”
“응... 그럴 수 있다면... 해줄게.”
“그럼... 그 분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사그러들었나요? 결국 세월이 약이겠죠? 저도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그 사람을 잊고 살아갈 수 있겠죠?”
“내가 걱정했던 것 보다 빨리 잊는 것 같기는 해. 놀랍기도 하고...”
“아저씨는 어떻게 잊었어요?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몰라. 한동안은 하루 종일 술에 찌들어 있기도 하고 멍하게 넋을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지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리 작더라도 그게 너무 보잘 것 없더라도 어떻게든 좋은 진동을 내 몸 속에 심어야 겠다는... 그러면 작은 진동이 내 안에서 퍼지고 그 아픔들을 치유할 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그냥 말 그대로 아주 작은 것들이야. 밝고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렸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억지로 힘을 내서 사무실 내 책상이나 차를 청소했고 아이들하고 운동장에 나가 뛰어 놀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몸매가 좋은 아가씨의 뒤태를 감상하면서 옷 안에 숨겨진 둔부를 상상하기도 하고... 별 거 아닌 일들이지만 잠깐이라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것 같아. 그러다가도 그 기억들이 날 괴롭힐 때면 다시 멍해져서 아무 것도 못하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시간이 몇 달이 흘렀을 거야. 소주 한 병은 마셔야 회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맨 정신으로 회사에 앉아 있는 날 발견했어. 조금 안심이 되더군. 한 고비를 넘어갔다고 생각했어.”
“좋은 진동이요? 호호호. 그게 결국 비결이었다는 거예요?”
“몰라. 그 건 증명할 길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거니까. 하지만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그 주파수에 맞춰 방송이 나오는 것처럼 내 몸 안에 나쁜 진동을 가지고 다니다 보면 그 비슷한 일들을 끌어 들이는 걸지도 모르니까.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내 인생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좋은 진동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
갑자기 지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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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가까이 걸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지하철 신반포역 근처의 아파트 단지였다. 오늘이 일요일이 아니고 회사나 일하는 곳으로 갔다면 그녀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 좀 더 쉬웠을텐데... 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내려 113동 현관으로 들어가는 그녀 뒤로 바짝 따라 붙어 자동문이 닫히기 전에 같이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그녀가 11층을 누르는 걸 확인한 후 난 15층을 누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가 오른쪽 세대 현관 앞으로 걸어가 자동 도어락을 여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 있는 1103호 우편함을 살펴보았지만 비어 있어서 단지 정문 앞 상가 부동산에 가서 붙어 있는 매매정보를 보니 113동은 205㎡. 매매가 22억 ~ 26억.
1103호. 아파트 시세. 키 165~168cm,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글래머 스타일. 긴머리. 오똑한 콧날. 지적으로 보이는 차분한 눈빛. 약간 하이톤의 여성스러운 목소리 외에 이름이나 그 이상의 것들을 확인할 길은 없어 보여 공항으로 가서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갔다.
금요일 우연히 김유미와 통화를 한 후 주말을 꼬박 투자해서 이유성의 또 다른 여자를 한 명 알아내긴 했지만 난 아직도 오정희 쪽에서 시작을 해야 하는지 이유성을 쳐야 하는지 확실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첫 번째 기연이었고 하얀 원피스나 또 다른 여자의 스토리까지 알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 걸 알아내기 위해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 여수까지 다시 가서 하얀 원피스를 일산까지 쫓은 이유도 오정희를 압박해서 무언가를 듣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이유성 쪽을 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자.
내가 이유성이라면 어떻게 할까? 오정희와 호텔에 같이 있던 사진... 하얀 원피스의 여자와 같이 있던 사진... 그 것들을 들이대면서 하얀 원피스의 남편에게 털어놓기 전에 순순히 이야기 하라고 한다. 뭘?
오정희와 있었던 일을... 이 스토리는 이상하다. 돈을 요구한다면 가능한 설정이 되지만... 그건 오정희도, 하얀 원피스도, 이유성도 모두 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다.
10년 전 민현규에게 돈을 요구하는 척하면서 돌려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나름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지금도 오정희를 치는 게 가장 쉬워 보이지만 그녀가 이유성과의 관계를 부정한다면 내가 계속해서 밀어 붙이기가 난감해질 수도 있다.
정말 그럴까?
몇 달 전 난 김유미와 이유성의 정사를 우연히 목격하고 김유미를 몰아세운 후 그녀의 몸을 가진 적이 있다. 그 땐 김유미의 몸을 가지고 싶다는 내 욕정이 너무 강해서 앞 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때도 이런 저런 변수는 많이 있었다. 김유미가 술 취한 날 미친 사람 취급했다면... 갑자기 경찰을 불렀다면... 아니 내게 무슨 증거가 있냐는 식으로 따지고 들었다면... 그 상황도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유미를 가진 그 밤에 있었던 일들이 그다지 꼬이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이유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낯짝이 두껍지 않고는 오리발을 내밀기는 만만치 않을 정도로...
오정희로 돌아온다면...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 김유미 때와 다르다. 그리고 단 둘이 있을 만한 기회를 잡기 힘든 것도... 김유미 때처럼 ‘니 년과 니 아들 친구 놈이 붙어먹은 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어’라고 말한다면 통할까? 통할 것이다. 오정희는 주변의 누군가에게 그 말이 들어가는 것조차 겁낼 것이다. 그런데... 난 왜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건...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몸이나 돈을 노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겠다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 고작 둘 사이에 처음에 어떻게 된 거냐고 십년이 넘게 지난 일을 듣고 싶다는 게 협박의 이유가 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능할 수도 있다. 갑자기 괜찮은 시나리오가 머리를 스쳤다.
다음 날부터 난 다시 오정희의 주변을 배회하며 오정희의 식구들.. 천용호와 그의 부인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붙어서 그들의 직업이 무엇인 지 어떤 사람인 지 알아내려 애를 썼다.
천용호는 판교에 본사가 있는 유통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회사는 상품을 주로 인터넷으로 판매하지만 연 매출은 몇 백억에 달하는 상당히 탄탄한 회사였고 그의 부인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00도서관에 자원봉사 활동을 다니는 성품이 매우 착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주말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있었고 천용호와의 사이에서 이제 막 돌이 지난 것 같은 아이가 하나 있었다.
한 주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그 가족들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토요일 점심 무렵 임진각 주변에 있는 장어구이 집에 가서 다른 친지들 몇 분을 모시고 식사를 할 때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정희는 이 단란한 가정이 자신의 아들 친구이기도 한 이유성과의 밀회가 천용호나 며느리의 귀에 들어감으로써 흔들리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오정희의 뒤를 캐게 된 적당한 이유와 괜찮은 연기가 뒷받침 된다면 그녀를 독안에 든 쥐로 몰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고 있었다.
주중에 지연이 전화를 해서 안부와 언제 만날 수 있는 지를 물었는데 그녀의 말투가 상당히 밝았다.
“저에요. 이번 주말에 시간 어때요?”
“응? 일요일 날 시간 괜찮아. 어디서 볼까?”
“가까운 야외에 나가요. 날씨 좋대요.”
“응.. 어디 갈지는 정해놨어?”
“아무데나 가요. 아니... 아저씨가 알아봐요. 나 같은 미인한테 인터넷 검색하면서 그런 거 알아보게 하는 건 좀 잔인하지 않아요?”
“알았어. 그러지 않아도 알아보려고 했다구..”
“일요일 아침 11시까지 우리 집 앞에 와서 전화해요.”
“응...”
전화를 끊은 후부터 난 언제 오정희를 치러 가야하는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 부터는 당분간 회사 일이 바빠서 주중에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았고 여수호텔에서 오정희와 이유성의 사진을 찍은 후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당장 결행을 해야 했지만 지연 때문에 망설이게 된 것이다.
난 지연이 이렇게 빨리 이유성을 잊을 줄 몰랐다. 그녀 스스로 마왕을 지울 수 있다면 내가 오정희와 이유성의 과거를 알아낼 필요가 없어진다. 그건 지연의 우울증이 심해져 벗어날 수 없을 때를 대비한 안배였으니...
밝게 전화한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 결정하기는 너무 섣부른 판단이기는 하지만 오정희나 김유미는 지금 이대로 흘러가기를 원할 것이다. 난 지연의 회복을 위해 그녀들의 삶에 끼어들려고 할 뿐 그게 아니라면 굳이 움직일 필요도 명분도 없다.
전화를 끊고 아이들과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면서 그 날 저녁 오정희에게 가려고 했던 마음을 일단 접었는데 결국 그 망설임의 대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만만치 않게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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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난 지연의 아파트 앞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집으로 올라가 그녀와 커피를 마셨다.
“어디로 갈 거예요?”
“응... 그게... 야구장 가는 게 어때? 표는 예매해뒀어. 두산하고 LG 경기야.”
“정말이요? 내가 두산 팬 인거 어떻게 알았어요? 이야기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선승철은 LG 트윈스의 골수팬이었다. 지연과 선승철이 야구를 보러 가면 서로 다른 팀을 응원했을 듯...
“몰랐어. 마침 서울 라이벌 경기가 주말에 있어서... 날씨도 좋고 연휴라... 겨우 예매했어.”
“잠깐요... 그럼 유니폼 입고 가야지...”
조그맣게 콧노래를 부르며 방안으로 들어간 지연은 등에 31번 정수빈이 쓰여진 남색 두산의 유니폼과 하얀색 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가끔 TV에서 볼 수 있었던 미녀 야구팬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야? 두산을 좋아했던 게...”
“중학교 때 부터요. 처음 절 야구장으로 데려갔던 게 동네 친구였는데 두산 팬이었어요. 같이 응원하다가 보니 저도 그만... 실은 아직도 정확한 야구 규칙은 잘 몰라요. 그냥 좋아하는 거죠. 아저씨는 어느 팀이 좋아요?”
난 LG팬이지만...
“그냥 야구를 좋아해. 특별히 더 좋아하는 팀은 없어.”
시원한 맥주 캔 몇 개와 치킨, 김밥 등을 사들고 잠실야구장으로 갔다. 마침 예매한 표가 3루 측이라 두산 응원단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안타나 큰 타구가 나올 때마다 환호하며 시간을 보냈고 지연이 좋아하는 정수빈은 5회초 무사 1루에서 우전 안타를 쳐 3:2로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때까지 좋았던 두산 응원단 분위기는 7회말 1사 후에 LG가 연속 3안타와 폭투, 실책 등을 묶어서 3점을 낸 후 조용해졌고 9회초에 나온 정수빈은 다시 안타를 때려냈지만 마무리 봉중근에 막혀 결국 두산이 3:5로 졌다.
끝날 때까지 응원가를 목 터져라 따라 부르며 응원하던 지연은 경기가 끝나자 씩씩거렸다.
“6회에 연속 안타를 맞을 때 투수를 바꿨어야 했다구요. 7회에 점수만 안 빼앗겼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지연은 투수 교체 타이밍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6회 선발 김승회를 교체해 올라온 이혜천은 안타 2개를 맞았지만 실점하지 않았고 7회에 다시 올라왔다가 첫 타자까지는 잘 잡고 그 이후 연속 3안타를 맞으며 무너졌는데... 처음엔 야구 규칙도 잘 모른다고 하더니 투수 교체 타이밍이 늦어서 졌다니... 참 미스테리한 여자다.
인파 속에 섞여서 야구장에서 나온 후에 10여분을 걸어 두산 팬들이 주로 간다는 호프집으로 갔다. 술집 안에는 2001년 두산의 마지막 우승 당시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고 두산 유니폼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난 지연과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고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그래도 두산 팬들은 행복한 것 같아. 우승한 지는 꽤 됐지만 가을 야구는 단골이고 간간히 한국시리즈에도 올라가는 강팀이잖아.”
“SK 때문에 우승을 두 번이나 놓쳤다구요. 한국시리즈에서 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아픈 줄 아세요?”
“생각보다 두산을 많이 좋아하네. 지금까지 그런 말 한 번도 안했었잖아.”
“결혼한 이후로는 다른 데 별로 신경을 못 썼어요. 요즘은 그래도 TV로 자주 야구 봐요. 7회에 이혜천을 계속 기용한 건 실수라고요. 정대현이나 홍상삼도 있었는데... 아니면 노경은을 좀 일찍 냈었어도 됐구.”
규칙도 잘 모른다더니 투수들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난 맥주만 마시기 맹숭맹숭해서 소주를 한 병 달라고 한 후 타서 마시기 시작했다.
“지하철 타고 오니까 술 마시기는 편하네요. 호호.”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보기 좋네. 혼자 있을 땐 어때?”
“혼자 있기 싫은 건 여전해요.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만도 하구. 오늘 야구만 이겼어도 기분 완전히 업 되는 건데...”
“이혜천은 왼 손 투수면서 직구 스피드가 145km가 넘는 아주 매력적인 카드야. 2001년 두산 우승 당시 자기 역활을 100% 했었고 일본 가기 전에는 류현진과 방어율 1,2위를 다툰 적도 있어. 일본 다녀오고 나이가 들면서 직구 스피드가 전성기보다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6회에 연속 안타 맞았을 때 감지했어야 해요. 1점 차 승부니까 필승조가 나갔어야죠.”
“하긴 올해는 초반부터 두산 성적이 좋으니 감독 입장에서는 이혜천을 바꾸고 싶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 보면...”
“뭘요?”
“지금 두산의 분위기에서 이혜천만 좀 살아난다면 대권 도전도 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6회에 안타 두 개를 맞았지만 무사히 막고 내려온 베터랑 선수를 내리기 그랬을 거야. 금요일부터 LG와 3연전에서 이혜천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긴 몇 년 전만해도 이혜천 만큼 믿을 만한 카드도 없었는데...”
난 맥주 잔 안에 담긴 술을 한 잔 마신 뒤에 말을 이어갔다.
“이런 경우에 적당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다보면 질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승부가 있어. 지는 걸 알면서도...”
“무슨 말이에요? 질 걸 알면서도 승부를 해야 한다니...”
“응. 가끔은 그래... 사는 게 그렇더라고... 지는 걸 알면서도 승부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
“그게 언젠데요? 속 시원하게 말해줘요.”
“응? 글쎄... 내 경우를 이야기 한다기 보다는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야. 이 승부는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임하게 되는...”
“안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면 기세에서도 밀리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안하면 되는데... 그래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 승부에 지더라도 내가 왜 지는 지 이유를 알고 싶으니까...”
“실력이 떨어지니까 지죠.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요?”
“실력이라는 건 너무 넓은 의미잖아. 좀 더 디테일하게 알고 싶은 거지.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건지. 그런데 그 승부를 해서 졌을 때 잃는 게 너무 크다면 어떨까? 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
“글쎄요. 아무래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돌이킬 수 없다면...”
“주관적인 차이기는 한데... 생존의 문제가 걸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 눈물을 삼키면서 돌아서는 수 밖에... 어떻게 보면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작아지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니까.”
“그건 아저씨의 경험인거죠? 말해줘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 그 일은 떠 올리기 싫어. 그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라서...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그 정도였어요? 아저씨는 감정 같은 거 초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엄청 인간적으로 보이네요. 호호호.”
“잠을 못 잤었어. 한 동안... 악몽을 계속 꿨으니까...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회사 근처 슈퍼로 달려가서 소주 한 병을 나발 불고 나서 양치를 하고 입 냄새 제거하는 껌을 씹으며 직장 생활을 했고... 술 기운이 좀 떨어지면 다시 슈퍼로 달려가서 안주도 없이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고...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도저히 뭐요?”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도망치듯 승부를 피한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보여서...”
“우울증 같은 게 왔었나요? 저처럼?”
“그게... 글쎄... 뭐랄까?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생긴 홧병 같은 걸 거야. 그 게 더 가까울 것 같아.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다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지금은 괜찮은 걸 보면 그래도 극복한 거 아닌가요? 아직도 뭐가 더 남아 있어요?”
“그러게. 뭐가 더 남았을까? 지금 니가 보고 있는 겁쟁이 중년 남자가 아닐까?”
“아저씨가 겁쟁이라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난 살며시 미소를 띠며 지연의 뾰로통한 표정을 바라봤다.
“난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 그 땐 내가 지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으니까...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었다면 끝을 보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겠지. 그랬다면... 모르겠어.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지도... 도망치고 나서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위로 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 지는 이유를 모른다면 도망치는 게 옳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이렇게...”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더 궁금해지는 걸요? 언제쯤 이야기 해줄지는 몰라도 기다릴게요. 아저씨 마음이 더 편해지면 말해줘요. 그럴 거죠?”
“응... 그럴 수 있다면... 해줄게.”
“그럼... 그 분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사그러들었나요? 결국 세월이 약이겠죠? 저도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그 사람을 잊고 살아갈 수 있겠죠?”
“내가 걱정했던 것 보다 빨리 잊는 것 같기는 해. 놀랍기도 하고...”
“아저씨는 어떻게 잊었어요?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몰라. 한동안은 하루 종일 술에 찌들어 있기도 하고 멍하게 넋을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지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리 작더라도 그게 너무 보잘 것 없더라도 어떻게든 좋은 진동을 내 몸 속에 심어야 겠다는... 그러면 작은 진동이 내 안에서 퍼지고 그 아픔들을 치유할 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그냥 말 그대로 아주 작은 것들이야. 밝고 경쾌한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렸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억지로 힘을 내서 사무실 내 책상이나 차를 청소했고 아이들하고 운동장에 나가 뛰어 놀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몸매가 좋은 아가씨의 뒤태를 감상하면서 옷 안에 숨겨진 둔부를 상상하기도 하고... 별 거 아닌 일들이지만 잠깐이라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것 같아. 그러다가도 그 기억들이 날 괴롭힐 때면 다시 멍해져서 아무 것도 못하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시간이 몇 달이 흘렀을 거야. 소주 한 병은 마셔야 회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맨 정신으로 회사에 앉아 있는 날 발견했어. 조금 안심이 되더군. 한 고비를 넘어갔다고 생각했어.”
“좋은 진동이요? 호호호. 그게 결국 비결이었다는 거예요?”
“몰라. 그 건 증명할 길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거니까. 하지만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그 주파수에 맞춰 방송이 나오는 것처럼 내 몸 안에 나쁜 진동을 가지고 다니다 보면 그 비슷한 일들을 끌어 들이는 걸지도 모르니까.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내 인생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좋은 진동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
갑자기 지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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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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