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 중앙의 대형 스크린 앞에 모인 게임 참여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물론, 3라운드 마지막 게임이기에 그 누구더라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꼭 참여자들의 긴장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서영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모르는 곳에서 불길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영이 보기에는 수영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거의 표정 변화가 없긴 했으나, 문득문득 보이는 6번 부부의 영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뭘까... 뭘까... 도대체... 이 불안함은...’
서영은 자신의 남편인 민혁의 얼굴에서 불안함의 끝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아니, 누군가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끼는 듯 민혁의 얼굴은 굳어 있는 채로 좀처럼 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서영이 민혁에게 조심스레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대답 없는 민혁을 바라보며 서영은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하하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추행범과 피해자가 결정되었는데요? 투표에 앞서 피해자를 밝히고 추행범을 잡기 위한 약 30분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피해자는 스스로 밝히시죠?
대형 스크린에는 치킨 박이 등장을 했다. 그리고 치킨 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혁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스스로 알린 것이었다.
“접니다.”
민혁의 말이 끝나고 서영은 자신은 더 이상 투표권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수영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는 기권 규정의 경우가 아닌 이상 탈락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4라운드 진출은 거의 확정이었다.
- 하하하. 이번에는 1번 부부인 최민혁님과 김서영님이 피해자가 됐군요. 기권 규정의 경우 나오지 않는 이상 4라운드 진출이 확정이 됩니다. 미리 축하드릴까요? 하하하.
친절한(?) 치킨 박이 민혁과 서영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서영은 치킨 박의 말을 들으며 5번 부부와 6번 부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가 추행범이지... 민혁씨가 피해자였다면... 수영이가 추행범은 아니었을 것이고... 혹 6번 부부인가?’
서영은 수영이 추행범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추행범으로 결정이 되었다면 굳이 민혁을 피해자로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영이 생각하기에 추행범 팀은 5번 부부 혹은 6번 부부 둘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6번 부부일 것 같아... 영호라는 남자가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것을 보면... 아니... 아닌가... 5번 부부를 탈락시키자는 일종의 무언의 사인 같은 걸까...’
서영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자신이 투표권이 없었기에 이제는 3번, 5번, 6번 부부의 일대일대일의 싸움이 된 것이었다. 투표권이 있는 세 부부가 최악의 상황에 빠지면, 서로 한 표씩 받고 전원 탈락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영은 불안한 마음이 점점 가속화 되어가고 있었다. 수영과 함께 4라운드 동반 진출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야. 추행범을 잡을 수 밖 에...’
서영은 포지션을 확실히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투표권이 없었기에 수영을 살려내려면 반드시 추행범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5번 부부나 6번 부부나 믿을 수 없음에는 매한가지였다.
“자... 자기야... 누구야? 추행범은... 자기는 알고 있지?”
급한 마음에 서영이 민혁에게 추행범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리고 모든 참여자들이 민혁의 입에 집중했다. 민혁의 말 한 마디에 추행범이 결정이 될 것이고, 그것이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중요하지는 않았다. 피해자에게 추행범으로 낙인찍히면 마지막 게임에서는 상당히 불리할 수 밖 에 없었다. 표가 고작 3표 밖에 되지 않았으니...
“... 알고 있기는 한데...”
“그래?”
민혁의 대답을 들은 서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추행범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수영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누구야? 말해 봐.”
서영이 입을 닫고 있는 민혁을 재촉했다. 그리고 민혁은 서영 대신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민혁이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영호의 얼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추행범이... 수영이었군..’
영호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힐 정도로 예상이 잘 들어맞자, 마음 한쪽에서 끓어오르는 뿌듯함에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지만, 또한 스스로 위기를 탈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영호는 이제 확신이 들었다.
‘난 무조건 4라운드 진출한다.’
영호의 흔들기가 성공하고 있었다. 민혁이 말없이 수영을 바라보자 서영은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설마?”
서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민혁으로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민혁은 서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맞아. 수영이가 추행범이야.”
민혁의 입에서 수영이 추행범이라는 사실이 확인이 되었고, 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외쳤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비단 서영 뿐 만 아니라 수영이가 추행범이라는 사실에 모든 참여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민혁의 뜻은 완고했다.
“맞아. 그 년이 배신을 했어!”
말은 못하고 듣지도 못했지만, 명진은 현재 분위기가 어떠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민혁을 향해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수영이 추행범이 아니라며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니라고? 씨발. 아니라고? 니 좆같은 마누라가 우리를 배신했단 말이야!”
민혁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서영은 당장에라도 귀라도 막고 싶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기에 멍하니 소리치는 민혁만을 바라봐야 했다.
“난 봤어! 다 봤단 말이야! 지난밤에 화장실에서 수영이라는 년과 저기 영호라는 놈이 만나는 것을... 그리고 들었어! 서로 믿는다고 말했단 말이야!”
민혁이 서영에게 다시 한 번 소리를 쳤다. 서영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비록 알게 된지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영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 수영아...”
서영이 수영을 부르며 바라봤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은 긍정을 뜻했고, 마치 민혁의 말을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수영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 말 해봐.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해야지.”
서영이 처절하게 수영에게 애원을 하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서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영에게서의 시선을 돌려 영호를 쳐다보았다. 영호는 서영이 자신을 쳐다보자 씨익 웃어주었다.
“거 봐. 저 자식도 웃고 있잖아... 우리는 배신을 당한 거야. 탈락할 위험에 빠진 거라고!”
민혁의 말을 들은 서영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넋이라도 빠진 것처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수영이가 그럴 리가...”
“아직도 모르겠어? 왜 저들이 배신을 했는지? 여기 있는 사람... 아니 5번 부부 잘 들어!”
민혁은 모든 참여자들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더 이상 예의를 찾을 이유도 없었다. 민혁의 생각에는 자신들이 마지막 게임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5번 부부를 공략해서 수영과 영호의 생각을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당신들이 계속 기권을 하니까... 3번 부부와 6번 부부가 기권 규정을 이용해서 우리 부부를 탈락 시키려고 해. 그러면 상금 칩이 10개나 되니까 말이야. 대신에 내가 당신부부에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지. 저들이 기권을 할 때, 당신부부만 투표를 한다면... 홀로 4라운드 진출이 확정이 되지... 저 개같은놈년들과 함께 4라운드에 갈 필요 없잖아? 난 이대로 탈락해도 좋아. 대신에 저 개같은놈년들과 함께 죽을 거야... 알았어?”
민혁의 말에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두 손을 모았다.
“씨발... 이 상황에 또 기도야! 절대 기권 하면 안 돼. 투표를 하란 말이야!”
민혁의 말을 듣지 않는 5번 부부였고, 예상과는 다르게 영호의 입에서 하나의 제안이 흘러 나왔다.
“서로 함께 기권하면... 그 분도 좋아하시겠지요.”
말을 마친 영호가 입을 다시 닫았다. 물론, 영호는 기권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수영 부부가 절대 기권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의 발언으로 민혁을 좀 더 자극시킬 수는 있었다.
“씨발 개자식아! 끝까지 장난질이야? 전부 기권시켜놓고 개 같은 니 새끼만 투표 하려고 하잖아. 안 그래? 내가 너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 새끼야!”
민혁의 거친 말이 이어졌고, 스크린 앞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 그런데 그 험악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영호였다.
짝짝짝.
“재밌어. 아주... 좋은 시나리오였어.”
영호는 민혁을 조롱하고 있었다. 민혁은 그런 영호가 너무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러나 당장 영호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 그만... 해요.”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지금껏 고개만 숙이고 침묵을 했던 수영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수영의 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영이 정신을 차리고 수영에게 다가갔다.
“그... 그래... 수영이 진실을 말해... 진실을...”
서영은 수영의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지금까지 민혁과 영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모두 틀렸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제... 제가... 추행범... 맞아요.”
수영은 자신이 추행범이라고 밝혔고, 서영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왜 수영이가 피해자로 자신의 남편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거 봐! 맞잖아. 저 쌍년이... 추행범이라고... 우리를 배신한 거야.”
“추행범은... 맞는데... 다 이유가 있어요. 사정이 있어요. 민혁님이 생각하는 건.... 다 오해예요.”
“오해? 오해는 개뿔. 내가 봤다고 저 새끼랑 키스를 하는 것도...”
민혁의 말에 서영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놀라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협.... 협박을 당했어요... 그리고 제 반지를 가져갔단 말이에요.”
수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고, 서영은 즉시 수영의 손을 확인했다. 확실히 눈에는 수영이가 끼고 있어야 할 은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언니가 저를 살려주었듯이... 제가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세 번째 게임이 끝나면... 반지를 돌려준다고... 했어요.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수영이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서영은 수영의 말을 듣고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영호가 수영을 협박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을거야 좆까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그 시간에 키스도 하고... 내가 믿을 것 같아? 처음부터 이상했어. 저 남편이라는 병신 새끼는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면서... 너무 자연스럽잖아. 이게 말이 돼? 또 백혈병? 좆까라 씨발. 영수 새끼도 그런 구라를 깠었지. 난 죽어도 너희를 못 믿어.”
서영은 거친 민혁의 말에 반박을 할 힘도 없었다. 수영의 말을 믿긴 했지만, 서영은 남편인 민혁의 말도 무시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민혁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기에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난 안 믿어.”
“영호라는 남자가 웃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러면 수영이 말이 사실이라는 거잖아!”
서영이 어렵게 민혁을 설득시켜보려고 하지만, 그 역시 실패로 끝이 났다.
“내가 모든 것을 밝혔으니... 저렇게 웃고 있는 거야!”
“그... 그게 아니야... 수영이를 믿어야 한다고...”
“난... 절대 혼자서는 탈락 안 할 거야.... 절대...”
“내... 내가 확인 시켜 줄게...”
서영이 마지막 힘을 내어서 영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협박 했어요? 도대체 왜!”
“난 협박을 한 적이 없는데....”
“반지 가져갔다면서요? 돌려줘요!”
“무슨 반지?”
영호는 철저하게 서영의 질문에 모른 체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민혁은 점점 더 분노에 빠졌다. 서영의 행동이 쓸데없는 짓임을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무엇때문에 수영이를 위해 이토록 행동하는 것일까.
“그냥 와... 저 새끼랑 말을 해 봐야.... 그냥 오란 말이야!”
민혁이 서영에게 소리를 쳤다. 그리고 영호는 그런 민혁을 쳐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저... 저 새끼가...”
“훗.”
서영은 온통 머릿속이 복잡해져갔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 헷갈렸고, 무엇보다 영호가 왜 이렇게 진흙탕 싸움을 만드는지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바라는 것 하나는 수영 부부와 4라운드에 동반 진출하는 것 뿐 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 하하하. 시간이 다 됐군요. 아주 열띤 토론이었습니다. 이제 투표 해볼까요?
험악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깬 건 치킨 박의 웃음소리였다. 치킨 박이 세 번째 게임의 투표를 실시한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투표권을 가진 세 부부는 묘한 심리 싸움을 해나가야 했다.
“... 미안해... 반지를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어...”
투표가 다가오자 수영이 명진의 눈앞에서 손짓과 더불어 소리 없는 대화를 시도했다. 입술모양만 가지고도 말을 알아듣는 명진은 수영의 뜻을 이해하고 괜찮다는 듯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 6번... 6번 부부를 선택하겠어... 우리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 서영 언니에게 확인해주고 싶어...”
다시 한 번 명진은 수영의 뜻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자... 좋습니다. 그러면 3번 부부인 한명진님과 이수영님부터 투표를 시작해 볼까요? 하하하.
치킨 박의 말이 끝났고, 명진과 수영이 천천히 오른쪽에 있는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부부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으나, 그렇다고 위축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배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또박또박 걸어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명진과 수영 부부의 투표를 시작으로 3라운드 마지막 게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면 최종적으로 4라운드 진출자가 정해질 것이었다.
@ 46부에서 이어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서영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모르는 곳에서 불길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영이 보기에는 수영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거의 표정 변화가 없긴 했으나, 문득문득 보이는 6번 부부의 영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뭘까... 뭘까... 도대체... 이 불안함은...’
서영은 자신의 남편인 민혁의 얼굴에서 불안함의 끝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아니, 누군가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끼는 듯 민혁의 얼굴은 굳어 있는 채로 좀처럼 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서영이 민혁에게 조심스레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대답 없는 민혁을 바라보며 서영은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하하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추행범과 피해자가 결정되었는데요? 투표에 앞서 피해자를 밝히고 추행범을 잡기 위한 약 30분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피해자는 스스로 밝히시죠?
대형 스크린에는 치킨 박이 등장을 했다. 그리고 치킨 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혁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스스로 알린 것이었다.
“접니다.”
민혁의 말이 끝나고 서영은 자신은 더 이상 투표권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수영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는 기권 규정의 경우가 아닌 이상 탈락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4라운드 진출은 거의 확정이었다.
- 하하하. 이번에는 1번 부부인 최민혁님과 김서영님이 피해자가 됐군요. 기권 규정의 경우 나오지 않는 이상 4라운드 진출이 확정이 됩니다. 미리 축하드릴까요? 하하하.
친절한(?) 치킨 박이 민혁과 서영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서영은 치킨 박의 말을 들으며 5번 부부와 6번 부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가 추행범이지... 민혁씨가 피해자였다면... 수영이가 추행범은 아니었을 것이고... 혹 6번 부부인가?’
서영은 수영이 추행범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추행범으로 결정이 되었다면 굳이 민혁을 피해자로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영이 생각하기에 추행범 팀은 5번 부부 혹은 6번 부부 둘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6번 부부일 것 같아... 영호라는 남자가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것을 보면... 아니... 아닌가... 5번 부부를 탈락시키자는 일종의 무언의 사인 같은 걸까...’
서영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자신이 투표권이 없었기에 이제는 3번, 5번, 6번 부부의 일대일대일의 싸움이 된 것이었다. 투표권이 있는 세 부부가 최악의 상황에 빠지면, 서로 한 표씩 받고 전원 탈락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영은 불안한 마음이 점점 가속화 되어가고 있었다. 수영과 함께 4라운드 동반 진출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야. 추행범을 잡을 수 밖 에...’
서영은 포지션을 확실히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투표권이 없었기에 수영을 살려내려면 반드시 추행범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5번 부부나 6번 부부나 믿을 수 없음에는 매한가지였다.
“자... 자기야... 누구야? 추행범은... 자기는 알고 있지?”
급한 마음에 서영이 민혁에게 추행범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리고 모든 참여자들이 민혁의 입에 집중했다. 민혁의 말 한 마디에 추행범이 결정이 될 것이고, 그것이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중요하지는 않았다. 피해자에게 추행범으로 낙인찍히면 마지막 게임에서는 상당히 불리할 수 밖 에 없었다. 표가 고작 3표 밖에 되지 않았으니...
“... 알고 있기는 한데...”
“그래?”
민혁의 대답을 들은 서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추행범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수영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누구야? 말해 봐.”
서영이 입을 닫고 있는 민혁을 재촉했다. 그리고 민혁은 서영 대신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민혁이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영호의 얼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추행범이... 수영이었군..’
영호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힐 정도로 예상이 잘 들어맞자, 마음 한쪽에서 끓어오르는 뿌듯함에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지만, 또한 스스로 위기를 탈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영호는 이제 확신이 들었다.
‘난 무조건 4라운드 진출한다.’
영호의 흔들기가 성공하고 있었다. 민혁이 말없이 수영을 바라보자 서영은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설마?”
서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민혁으로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민혁은 서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맞아. 수영이가 추행범이야.”
민혁의 입에서 수영이 추행범이라는 사실이 확인이 되었고, 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외쳤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비단 서영 뿐 만 아니라 수영이가 추행범이라는 사실에 모든 참여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민혁의 뜻은 완고했다.
“맞아. 그 년이 배신을 했어!”
말은 못하고 듣지도 못했지만, 명진은 현재 분위기가 어떠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민혁을 향해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수영이 추행범이 아니라며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니라고? 씨발. 아니라고? 니 좆같은 마누라가 우리를 배신했단 말이야!”
민혁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서영은 당장에라도 귀라도 막고 싶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기에 멍하니 소리치는 민혁만을 바라봐야 했다.
“난 봤어! 다 봤단 말이야! 지난밤에 화장실에서 수영이라는 년과 저기 영호라는 놈이 만나는 것을... 그리고 들었어! 서로 믿는다고 말했단 말이야!”
민혁이 서영에게 다시 한 번 소리를 쳤다. 서영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비록 알게 된지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영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 수영아...”
서영이 수영을 부르며 바라봤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은 긍정을 뜻했고, 마치 민혁의 말을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수영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 말 해봐.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해야지.”
서영이 처절하게 수영에게 애원을 하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서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영에게서의 시선을 돌려 영호를 쳐다보았다. 영호는 서영이 자신을 쳐다보자 씨익 웃어주었다.
“거 봐. 저 자식도 웃고 있잖아... 우리는 배신을 당한 거야. 탈락할 위험에 빠진 거라고!”
민혁의 말을 들은 서영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넋이라도 빠진 것처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수영이가 그럴 리가...”
“아직도 모르겠어? 왜 저들이 배신을 했는지? 여기 있는 사람... 아니 5번 부부 잘 들어!”
민혁은 모든 참여자들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더 이상 예의를 찾을 이유도 없었다. 민혁의 생각에는 자신들이 마지막 게임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5번 부부를 공략해서 수영과 영호의 생각을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당신들이 계속 기권을 하니까... 3번 부부와 6번 부부가 기권 규정을 이용해서 우리 부부를 탈락 시키려고 해. 그러면 상금 칩이 10개나 되니까 말이야. 대신에 내가 당신부부에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지. 저들이 기권을 할 때, 당신부부만 투표를 한다면... 홀로 4라운드 진출이 확정이 되지... 저 개같은놈년들과 함께 4라운드에 갈 필요 없잖아? 난 이대로 탈락해도 좋아. 대신에 저 개같은놈년들과 함께 죽을 거야... 알았어?”
민혁의 말에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두 손을 모았다.
“씨발... 이 상황에 또 기도야! 절대 기권 하면 안 돼. 투표를 하란 말이야!”
민혁의 말을 듣지 않는 5번 부부였고, 예상과는 다르게 영호의 입에서 하나의 제안이 흘러 나왔다.
“서로 함께 기권하면... 그 분도 좋아하시겠지요.”
말을 마친 영호가 입을 다시 닫았다. 물론, 영호는 기권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수영 부부가 절대 기권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의 발언으로 민혁을 좀 더 자극시킬 수는 있었다.
“씨발 개자식아! 끝까지 장난질이야? 전부 기권시켜놓고 개 같은 니 새끼만 투표 하려고 하잖아. 안 그래? 내가 너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 새끼야!”
민혁의 거친 말이 이어졌고, 스크린 앞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 그런데 그 험악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영호였다.
짝짝짝.
“재밌어. 아주... 좋은 시나리오였어.”
영호는 민혁을 조롱하고 있었다. 민혁은 그런 영호가 너무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러나 당장 영호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 그만... 해요.”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지금껏 고개만 숙이고 침묵을 했던 수영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수영의 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영이 정신을 차리고 수영에게 다가갔다.
“그... 그래... 수영이 진실을 말해... 진실을...”
서영은 수영의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지금까지 민혁과 영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모두 틀렸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제... 제가... 추행범... 맞아요.”
수영은 자신이 추행범이라고 밝혔고, 서영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왜 수영이가 피해자로 자신의 남편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거 봐! 맞잖아. 저 쌍년이... 추행범이라고... 우리를 배신한 거야.”
“추행범은... 맞는데... 다 이유가 있어요. 사정이 있어요. 민혁님이 생각하는 건.... 다 오해예요.”
“오해? 오해는 개뿔. 내가 봤다고 저 새끼랑 키스를 하는 것도...”
민혁의 말에 서영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놀라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협.... 협박을 당했어요... 그리고 제 반지를 가져갔단 말이에요.”
수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고, 서영은 즉시 수영의 손을 확인했다. 확실히 눈에는 수영이가 끼고 있어야 할 은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언니가 저를 살려주었듯이... 제가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세 번째 게임이 끝나면... 반지를 돌려준다고... 했어요.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수영이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서영은 수영의 말을 듣고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영호가 수영을 협박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을거야 좆까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그 시간에 키스도 하고... 내가 믿을 것 같아? 처음부터 이상했어. 저 남편이라는 병신 새끼는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면서... 너무 자연스럽잖아. 이게 말이 돼? 또 백혈병? 좆까라 씨발. 영수 새끼도 그런 구라를 깠었지. 난 죽어도 너희를 못 믿어.”
서영은 거친 민혁의 말에 반박을 할 힘도 없었다. 수영의 말을 믿긴 했지만, 서영은 남편인 민혁의 말도 무시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민혁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기에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난 안 믿어.”
“영호라는 남자가 웃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러면 수영이 말이 사실이라는 거잖아!”
서영이 어렵게 민혁을 설득시켜보려고 하지만, 그 역시 실패로 끝이 났다.
“내가 모든 것을 밝혔으니... 저렇게 웃고 있는 거야!”
“그... 그게 아니야... 수영이를 믿어야 한다고...”
“난... 절대 혼자서는 탈락 안 할 거야.... 절대...”
“내... 내가 확인 시켜 줄게...”
서영이 마지막 힘을 내어서 영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협박 했어요? 도대체 왜!”
“난 협박을 한 적이 없는데....”
“반지 가져갔다면서요? 돌려줘요!”
“무슨 반지?”
영호는 철저하게 서영의 질문에 모른 체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민혁은 점점 더 분노에 빠졌다. 서영의 행동이 쓸데없는 짓임을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무엇때문에 수영이를 위해 이토록 행동하는 것일까.
“그냥 와... 저 새끼랑 말을 해 봐야.... 그냥 오란 말이야!”
민혁이 서영에게 소리를 쳤다. 그리고 영호는 그런 민혁을 쳐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저... 저 새끼가...”
“훗.”
서영은 온통 머릿속이 복잡해져갔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 헷갈렸고, 무엇보다 영호가 왜 이렇게 진흙탕 싸움을 만드는지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바라는 것 하나는 수영 부부와 4라운드에 동반 진출하는 것 뿐 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마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 하하하. 시간이 다 됐군요. 아주 열띤 토론이었습니다. 이제 투표 해볼까요?
험악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깬 건 치킨 박의 웃음소리였다. 치킨 박이 세 번째 게임의 투표를 실시한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투표권을 가진 세 부부는 묘한 심리 싸움을 해나가야 했다.
“... 미안해... 반지를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어...”
투표가 다가오자 수영이 명진의 눈앞에서 손짓과 더불어 소리 없는 대화를 시도했다. 입술모양만 가지고도 말을 알아듣는 명진은 수영의 뜻을 이해하고 괜찮다는 듯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 6번... 6번 부부를 선택하겠어... 우리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 서영 언니에게 확인해주고 싶어...”
다시 한 번 명진은 수영의 뜻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자... 좋습니다. 그러면 3번 부부인 한명진님과 이수영님부터 투표를 시작해 볼까요? 하하하.
치킨 박의 말이 끝났고, 명진과 수영이 천천히 오른쪽에 있는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부부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으나, 그렇다고 위축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배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또박또박 걸어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명진과 수영 부부의 투표를 시작으로 3라운드 마지막 게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면 최종적으로 4라운드 진출자가 정해질 것이었다.
@ 46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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