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로도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녀석은 시계가 정오를 가리킬 무렵 입을 열었다.
“그 때 미정이 할머니 병원비가 상당히 많이 나왔어요. 부산에서 전지훈련 중에 미정이를 데리고 내려와서 수술 받으시는 동안 미정이 옆에서 기다리다가 그 애가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으며 수술비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됐죠.
중학생 답지 않게 조숙했던 미정이는 어딘가에 신세지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기회를 보다가 그 애에게 제안을 했지요. 내가 몇 달 안에 군대에 간다. 그 때까지 내 애인이 되 주면 수술비를 해결해주겠다...
미정이가 조용히 다시 묻더군요. 애인이 되어 준다는 게 무슨 의미냐고. 그래서...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남자가 오빠 나이가 되면 밤에 무척 외롭다고... 일주일에 한 두 번쯤 안을 수 있게 해주면 된다고... 니 사정 때문에 나도 어렵게 꺼낸 말이니 생각해보고 싫으면 이야기하라고 했죠.
며칠 후에 수술비를 계산하는 데 미정이는 조용히 보고만 있더군요.“
“응... 그 다음엔?”
“전 방학이 끝난 후 휴학계를 내고 영장이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그 사이에 남해에 자주 와서 미정이와 관계를 맺고 돌아가곤 했죠. 처음엔 그 애가 어색하고 싫은 눈치를 많이 보였지만 관계가 계속되면 될수록 점점 적응을 하더군요. 게다가 저와 나이차이가 7살 정도 밖에 안 나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와 결혼을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전 학교에도 같이 잠을 자는 사이인 여자친구도 있었고 몸뚱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 애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어요. 그러다 10월 말 군대에 가기 일주일 전쯤, 미정이와의 관계를 알고 있던 친구 놈이 자신에게 넘기고 가라고 해서...“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민현규가 목이 탄 지 갑자기 정수기로 가서 목을 축이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배 안고프세요. 뭐라도 하나 시킬까요?”
“응.. 배고픈데... 간짜장 같은 거 되나? 소주 한 병 가져오라고 하고...”
난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형 동생 사이인 듯 녀석에게 대꾸를 했고 민현규가 중국집에 전화해서 음식을 시킨 후에 다시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정이에게 내가 군대에 가니 외로울 때 친구 놈하고 자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가 그래서... 술이 약한 그 애에게 맥주를 좀 마시게 한 후에 친구 놈이 살던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서 눕혔죠. 그리고 전 미정이의 옷을 벗긴 후 좀 더듬다가 밖으로 나왔어요. 술이 취해 정신이 없다가 비몽사몽간에 옷을 벗기는 사람이 저라는 걸 확인한 미정이는 저로 착각하며 그놈과 잤고... 전 집으로 왔어요. 어차피 군대에 가면 그 애와 또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으니...
그런데 친구 놈이 새벽녘에 전화를 해서 받았더니 한 번 했고 그 때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던 미정이를 두 번째 안으려고 할 때 그 애가 옆에 있는 남자가 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더군요. 그 때 그 놈이 나랑 술에 취해 왔었는데 내가 취해 집에 간다고 가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군대에 가면서 널 자신에게 넘기고 간다고 하면서 데려다 놓고 갔다고 말했대요. 미정이는 화가 나서 녀석을 밀치고 나가버렸다더군요.
그리고 다음 날 미정이가 전화하는 걸 몇 번 받지 않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서 이야기했죠. 이제 계약 끝났고 나 군대에 며칠 있으면 입대하니 잊어버리고 살라고. 그 애가 그러더군요. 계약이 끝났고 군대에 가면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지 왜 다른 남자와 자게 했냐고. 뭐라 할 말도 없고 해서 그 놈이 돈이 많아서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지요. 미정이가 코치님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지만... 남자 너무 믿지 말아라 라고 말하고 끊어 버렸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입대를 했는데 그 사이에 몇 번 더 전화가 왔긴 했지만 받지 않았고...“
정재희에게 녀석이 한 일을 생각해보면 이대 이는 아니더라도 미정이를 두고 이대 일로, 혹은 미정이와 친구가 하는 걸 옆에서 보고 즐기려 했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그 것까지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궁금한 건 왜 녀석이 군대에 간다는 이유로 미정이를 버리려 했느냐는 것이었는데 학교에 애인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석연치 않았다. 몸뚱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게 문제가 된 듯 한데...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건 미정이가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려 했다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민현규를 옭아매려 했을지도...
“미정이가 너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은 어떻게 알았지? 그 애가 그렇게 이야기 했어?”
“처음엔 저한테 마음을 전혀 열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거 있잖아요. 조숙하고 도도한 여학생 분위기... 그런데 몇 번 잠을 잔 뒤에는 거의 매일 전화를 하다시피하고 또 편지 같은 걸 보내고...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자기가 스무 살이 된 후에도 코치님과 연인 사이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군대에 갈 때까지 계약을 하고 만난 사이라는 건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더군요.“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도착했고 난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라 녀석에게 권한 후 다른 컵에 한 잔을 가득 채워 원 샷을 했고 간짜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요즘은 낮에도 술을 한 잔 걸쳐야지... 맨 정신으로 있으면 우울해져.. 씨발..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하는 일 없이 있으려니...”
“복직 안하세요? 형님...”
“모르겠다. 이제 휴직한 지 두 달 밖에 안됐는데... 천천히 생각해야지... 근데 니 친구들은 여자도 서로 넘기고 그러냐? 난 통 이해가 안간다... 자기 여자 남이 쳐다만 봐도 성질나고 그러지 않나?”
“그... 그 놈하고는 소시 적에 많이 놀던 사이라...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러곤 했어요. 같이 가출한 여자애들 꼬셔서 여관 같은데서 술 진탕 먹여 놓고 정신없을 때 파트너 바꿔가면서 논 적도 있고요. 미정이를 그 놈한테 이야기했더니 계속 졸라 대서 그만...”
“으응?.. 잘났다.. 참... 짜장 부르튼다. 먹어.”
정재희에게 들은 이대 이 커플 섹스 이야기를 해서 녀석을 좀 압박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놈은 약간 자랑을 하 듯 무용담을 털어 놓고 있었고 미정이가 코치님으로 만난 민현규가 새 차를 타고 다니고 병원비 몇 백을 선뜻 내줄 정도의 재력이 있으며 밤에 그런 사이가 됐다면 충분히 이 녀석에게 집착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능한 이야기였다.
“유선미는 어떤 식이었지? 이왕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해봐라... 나도 좀 배우자.. 난 맘에 드는 애가 있어도 한 번 먹기가 그렇게 힘들던데... 넌 왜 그리 쉽냐? 씨발...”
“아... 선미요? 처음에 여기 면접 왔을 때 대충 이야기해보니 알겠던데요. 저녁 6시 까지만 일하라고 하고 월급은 한 달 60만원 준다고 했더니 더 늦게까지 하고 더 받을 수도 있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돈이 필요한 사정을 물었더니... 다이어트 약을 통신 판매로 샀는데 150만원 정도 빛이 있대요. 아빠가 알면 맞아 죽는다고...
70만원 주기로 하고 일단 출근을 시킨 뒤에 일 하면서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죠. 1년 정도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석 달 전에 헤어졌다더군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였는데 그 쪽에서 결혼까지 생각하는 듯해서 싫다고 했다는 것 같아요.
150만원 주면 내 애인 할래 하고 장난하듯 물었더니 정말이냐고 되묻더군요. 사장님은 유부남인데 그래도 되냐고 제 걱정까지 하고...
어제 아침에 은행에서 150만원을 찾아와 오후 한가한 시간에 그 애에게 주면서 앞으로 석 달 동안 내 애인 할 거면 이 돈 니 거라고 했어요. 얼굴이 빨개지면서 받더니 저녁에 차 태워 모텔 앞에다 주차시켜도 아무 말 없이 같이 들어가던걸요.“
“니가 돈이 많긴 많은가보다. 150만원 정도는 부담 없이 쏘는 걸 보니...”
“그 정도 여유는 있어요. 150만원 주고 석 달 동안 여대생 품으면 되죠. 그리고 돈 맛을 본 여자애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도 어렵지 않게 데리고 잘 수 있어요. 공짜로 데리고 자려고 하는 놈들보다는 그래도 인간적 아닌가요?”
어찌 보면 민현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여자한테 사기 쳐서 돈 뜯고 몸 버리게 하는 놈들도 많은 세상이니까...
“그래? 여대생 맛보니 좋디?”
“형님두... 그 게 그거죠. 뭐... 그래도 선미는 남자랑 잔 지 석 달이 돼서 그런지 몰라도 많이 느끼는 것 같던데요.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어요.”
녀석이 점점 자연스럽게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쉽게 사연들을 털어 놓고 있었고 난 미정이를 친구 방에 밀어 넣었을 때 스토리가 다시 궁금해졌다.
“현규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라. 나도 여자랑 놀 만큼 놀아본 놈이니 걱정 말고... 분위기 좋은 데 설마 내가 널 이해 못해서 난리 칠 일 없을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예... 알겠습니다. 형님.. 물어보세요. 다 말할게요.”
“미정이를 니 친구에게 넘겼다던 그 날... 너랑 니 친구랑 그 애를 같이 건드린 거 아니냐? 왜 그런 거 있잖아. 둘이서 여자 한명하고 즐기는 거...”
“아.. 그 때요... 미정이는 그렇게까지 섹을 밝히는 아이는 아니여서... 그러기 힘들죠. 친구 놈도 그 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녀석은 미정이를 계속 데리고 놀고 싶어 했으니까요.”
갑자기 이 녀석이 마약이나 최음제 종류의 약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재희와 모텔에서 이대 이로 즐겼다는 그 날도 정재희는 술에 너무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었는데...
하지만 향정신성의약품이나 마약류를 민현규가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 털어놓게 만드는 일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 건 죄질이 너무 무거워 사용, 취급, 제공자 모두가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이고 아무리 녀석과 내가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조금 친해졌지만 직접적인 증거 없이 입에 담게 되면 갑자기 어색해 질 것이다.
장난식으로 한 번 떠볼까하다가 핸드폰 사진하고 캠코더 녹화 분을 녀석이 보는 앞에서 깨끗이 지워 주고 저녁 때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제안을 거절한 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지고 매장을 나섰다.
“정재희에게도, 선미아빠나 니 마누라한테도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는 하지 않으마. 그럼 넌 당분간 선미와 즐길 수도 있고... 얼마 뒤에 정재희의 어머니가 회복되면 그녀와의 사이도 가능하겠지...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는데... 약 같은 건 사용하지 말고 몸만 섞어라. 만약 내가 갑자기라도 다시 이곳에 와서 정재희나 유선미에게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그 때는 용서 없다.“
"걱정마세요. 그런 건 안해요. 형님."
그 곳을 나와 내 차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자니 가을 오후 파아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미정이가 생각났다. 미정이는 중학생 시절 상처받기 쉬운 나이에 수영부 코치였던 교생 녀석에게, 그것도 자신의 첫 남자에게 버림받은 것도 견뎌냈다. 그런데 왜 나와의 관계에서 자살을...?
민현규는 돈을 이용해 어떻게 보면 아주 쉽게 여자들을 허물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암컷은 수컷보다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유사 이래 끊임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생존의 도구로 몸을 이용해왔고 지금도 돈이라는 생존 수단을 위해 여성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걸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민현규 같은 남자들도 마찬가지... 원래 세상은 그런 거니까...
최소한 녀석이 정재희에게 월급 외에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를 취한다면 그걸 억지로 말릴 권리는 내겐 없었고 그래도 겉에서만 바라본 민현규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해보니 녀석이 돈보다 여자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 나름대로의 주관에 의해 움직이는, 괜찮은 구석도 찾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싶었다.
정재희에게 전화를 해서 휴직기간은 끝나 가는데 민사장과 아르바이트 여대생은 그동안 계속 지켜봤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과 아무래도 민사장과 있었던 일은 우연인 것 같고 그 동안 고민해봤지만 남녀의 사랑문제에 끼어드는 건 아무리 내가 경찰이긴 해도 내키지 않으니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매장으로 출근해서 당분간이라도 일을 계속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전에 근무하던 경찰서에 가서 마무리 할 게 있어서 잠시 이 곳을 떠날 거라고 이야기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데다 실마리는 끊겨 있었고 오후 내내 장터 주변 공원을 서성이며 망설이던 나는 광양을 떠나 남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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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후 황지연에게 문자를 했다. 내가 먼저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김유미와 일요일 저녁 술자리가 끝난 후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을 지나는 동안 이유성과 그녀 사이에 벌어졌음직한 시나리오를 생각했었고 황지연의 상태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뭐해? 주중에 한 번 볼 수 있어?]
[주중에요? 내일이나 모레는 가능해요. 오늘은 좀 힘들구요.]
[응. 어디서 볼까?]
[내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올래요? 시간은 한 9시쯤...]
강원도에서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난 모르는 척 물었다.
[응. 괜찮긴 한데... 왜 선약이 있어? 너무 늦지 않아?]
[업무가 좀 밀려서요. 집에서 밥 해먹게 저녁 먹지 말아요.]
[뭐 하러 그래.. 그냥 밥 사먹으면 되지... 피곤하잖아...]
[아니요. 그냥 해 먹어요. 저 요리 꽤 하거든요. ㅎㅎ]
내가 그 곳에서 자면 새벽에 직장으로 가려는 걸까? 부담이 될 텐데...
[혹시 다음 날 출근이면 주말에 봐도 괜찮아. 무리하지 마]
[괜찮아요. 목요일 휴가 낼 거예요.]
황지연은 아직 날 보고 있었고 내 제안에 대한 반응도 기대 이상이었지만 난 그녀를 믿지 않고 있었다. 이유성과의 관계를 끊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는 어디로 날아가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다음 날 밤 9시... 난 황지연의 아파트 입구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는 입구를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몇 분 지나지 않아 황지연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양 손에 장바구니와 비닐 봉투를 들고 아파트 현관 문을 향해 뛰어 왔다.
“언제 왔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 우산은 어쩌고? 이리 줘.”
난 그녀의 오른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건네받고 나서 우리는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주차장 입구가 우산 쓰기는 좀 애매한 거리에 있어요. 이 정도 비는 그냥... 호호”
“응. 업무는 다 끝내고 왔어?”
“그럭저럭이요. 배고프죠?”
“조금... 참을만해.”
신혼부부가 나눔직한 이야기 들이 오고 갔고 그녀와 나는 15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그녀에게 밖에서 조금 기다릴까 하고 물었는데 지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안방으로 가더니 문을 닫지 않은 채로 정장 형식의 짙은 남색 투피스를 벗고 노란색 7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는데 날 의식하지 않는 듯 움직이는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뒤에서 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옷을 갈아 입은 그녀가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난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2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김치찌개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자 난 거실로 들어가 그녀에게 물었다.
“김치찌개야? 맛있겠다.”
“간단히 하려구요. 다른 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응.. 냄새 맡으니까 갑자기 엄청 배고파지는데...”
“잠깐만요. 10분이면 돼요.”
“밥 먹고 영화 볼래? DVD 빌려올게.”
“영화요? 예전엔 많이 봤는데...”
지연이 말끝을 흐린다. 하긴 이유성과 사이가 소원해지고 나서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 가슴 아팠을 것이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
“술 있어? 나가서 소주 사올까?”
“있어요. 냉장고 안에 세 병. 베란다에 몇 병 더 있어요.
난 지연과 술 마시고 섹스 하는 것 외에는 같이 나눌 게 없을까? 그녀는 내게 술을 같이 마셔주고 안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까? 내가 그녀가 원하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어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이유성을 밀어내기 위해 날 향해 움직이지만 그 녀석과 완전히 남남이 되는 그 순간에 지연이 내가 있어 주길 바라는 곳이 어디쯤인지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식사하세요.”
어느 새 식탁위에는 먹음직스러운 고등어구이와 계란말이가 김치찌개와 함께 차려져 있었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지연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와 잔을 채워주며 웃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죠? 맛있게 드세요..”
“응... 군침 넘어간다. 잘 먹을게.”
그녀가 반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내 밥공기는 바닥을 보고 있었고 한 그릇을 더 받아 순식간에 다시 비웠다.
“이거.. 찌개 맛이 예술인데... 요리 좀 한다는 거 진짜인 것 같아. 원래 고수는 평범한 음식을 잘 하는 건데...”
“호호.. 그렇게 맛있게 드시니 기분이 좋네요. 특별히 담에 또 해 줄게요”
“황송하지... 이런 김치찌개면 일 년 열두 달 먹어도 안 질리겠는 걸..”
술이 몇 잔 오고 간 후에 지연이 묻는다.
“오늘 몇 시까지 있을 수 있어요?”
“자고 가도 돼. 쫓아내지만 않으면...”
“잘 됐다. 호호.. 물어볼게 있어서요.”
“응?.. 왜 그래.. 저번처럼 이상한 거 묻기 없이...”
난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물어볼 게 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고 만약 내 시각이 궁금한 게 있다면 쉬운 질문 일리 없다.
“아저씨가 볼 때는 그 동안 내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힘들어 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 걸 판단하는 데 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물어봐도 좋아요. 모르는 걸 제외하고는 알려 드릴게요.”
아... 이건 뭐냐? 저번에도 이상한 질문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더니... 왜 그런 걸 내게 묻는 거지? 그리고 이제 내게 모든 걸 오픈하다는 이야기인가? 자신이 경찰이라는 것마저도...
“응?.. 그 이유를 나한테 묻는 게 어딨어? 내가 무슨 심리학자도 아니고... 저번에 니 나름대로 이유를 찾은 것 같은데... 그리고 설마 그 걸 내가 알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요. 아저씨는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래봬도 저... 기억력이 좋아서 아저씨가 한 말들 대부분 다 기억해요. 처음 만난 날 아저씨는 한 때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닌가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 못한다고... 근데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아저씨를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 전 아저씨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잘 읽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로 우리 아빠의 생각을 읽기도 하고... 그리고 민망한 이야기지만 절 처음 봤을 때 제가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아저씨는 알고 있었어요. 우리 아빠도 그래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선 자신을 최대한 숨기죠. 그래야 사람들이 무언가를 드러내고 그럼 만약에 생길지도 모르는 어떤 관계에서 유리한 곳을 점령할 수 있다고 했어요.
아빠에게 지금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뭔지 물어볼 수는 없어요.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주관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죠.
자. 말해줘요. 전 지난 며칠 동안 아저씨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것들을 입속으로 되뇌면서 지냈어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래 그런 일이 내게 생겼을 뿐이다. 그래요. 그렇게 조용히 며칠이 지나갔어요. 하지만 아저씨라면 무언가를 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에 대한 걸 알고 싶다면 어떤 질문이라도 해도 좋아요. 그리고... 아무리 뻔한 이야기를 해도 화내지 않을 거고 우리 관계도 이대로 계속될 거라는 것도 약속할게요.
하지만...“
“하지만? 또 뭐?”
“제 문제에 대한 아저씨의 견해에 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룰 줄 아세요.”
제대로 걸렸다. 지연은 빠져 나갈 구멍을 막아버린 채 나를 압박했고 내 머리는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무언가 답을 찾고 있었다.
“그 대가라는 게 널 안지 못하는 거야?”
“모르겠어요. 아마 안는다고 하더라도 아저씨에게 열린 마음의 문이 닫힐 거예요.”
역공이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지금 그녀에게 내가 김유미에게 들은 이유성의 마공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한다 해도 내게 들은 것만으로 지연이 스스로 흐름을 돌릴 수 있을 거라는 감이 아직 오지 않는다.
손자병법은 비겁의 철학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기지 못할 싸움을 시작해선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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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업데이트가 느린 이유는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일도 많고.. 휴가에... 이해해주시길 .,..
“그 때 미정이 할머니 병원비가 상당히 많이 나왔어요. 부산에서 전지훈련 중에 미정이를 데리고 내려와서 수술 받으시는 동안 미정이 옆에서 기다리다가 그 애가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으며 수술비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됐죠.
중학생 답지 않게 조숙했던 미정이는 어딘가에 신세지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기회를 보다가 그 애에게 제안을 했지요. 내가 몇 달 안에 군대에 간다. 그 때까지 내 애인이 되 주면 수술비를 해결해주겠다...
미정이가 조용히 다시 묻더군요. 애인이 되어 준다는 게 무슨 의미냐고. 그래서...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남자가 오빠 나이가 되면 밤에 무척 외롭다고... 일주일에 한 두 번쯤 안을 수 있게 해주면 된다고... 니 사정 때문에 나도 어렵게 꺼낸 말이니 생각해보고 싫으면 이야기하라고 했죠.
며칠 후에 수술비를 계산하는 데 미정이는 조용히 보고만 있더군요.“
“응... 그 다음엔?”
“전 방학이 끝난 후 휴학계를 내고 영장이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그 사이에 남해에 자주 와서 미정이와 관계를 맺고 돌아가곤 했죠. 처음엔 그 애가 어색하고 싫은 눈치를 많이 보였지만 관계가 계속되면 될수록 점점 적응을 하더군요. 게다가 저와 나이차이가 7살 정도 밖에 안 나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와 결혼을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전 학교에도 같이 잠을 자는 사이인 여자친구도 있었고 몸뚱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 애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어요. 그러다 10월 말 군대에 가기 일주일 전쯤, 미정이와의 관계를 알고 있던 친구 놈이 자신에게 넘기고 가라고 해서...“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민현규가 목이 탄 지 갑자기 정수기로 가서 목을 축이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배 안고프세요. 뭐라도 하나 시킬까요?”
“응.. 배고픈데... 간짜장 같은 거 되나? 소주 한 병 가져오라고 하고...”
난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형 동생 사이인 듯 녀석에게 대꾸를 했고 민현규가 중국집에 전화해서 음식을 시킨 후에 다시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정이에게 내가 군대에 가니 외로울 때 친구 놈하고 자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가 그래서... 술이 약한 그 애에게 맥주를 좀 마시게 한 후에 친구 놈이 살던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서 눕혔죠. 그리고 전 미정이의 옷을 벗긴 후 좀 더듬다가 밖으로 나왔어요. 술이 취해 정신이 없다가 비몽사몽간에 옷을 벗기는 사람이 저라는 걸 확인한 미정이는 저로 착각하며 그놈과 잤고... 전 집으로 왔어요. 어차피 군대에 가면 그 애와 또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으니...
그런데 친구 놈이 새벽녘에 전화를 해서 받았더니 한 번 했고 그 때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던 미정이를 두 번째 안으려고 할 때 그 애가 옆에 있는 남자가 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더군요. 그 때 그 놈이 나랑 술에 취해 왔었는데 내가 취해 집에 간다고 가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군대에 가면서 널 자신에게 넘기고 간다고 하면서 데려다 놓고 갔다고 말했대요. 미정이는 화가 나서 녀석을 밀치고 나가버렸다더군요.
그리고 다음 날 미정이가 전화하는 걸 몇 번 받지 않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서 이야기했죠. 이제 계약 끝났고 나 군대에 며칠 있으면 입대하니 잊어버리고 살라고. 그 애가 그러더군요. 계약이 끝났고 군대에 가면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지 왜 다른 남자와 자게 했냐고. 뭐라 할 말도 없고 해서 그 놈이 돈이 많아서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지요. 미정이가 코치님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지만... 남자 너무 믿지 말아라 라고 말하고 끊어 버렸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입대를 했는데 그 사이에 몇 번 더 전화가 왔긴 했지만 받지 않았고...“
정재희에게 녀석이 한 일을 생각해보면 이대 이는 아니더라도 미정이를 두고 이대 일로, 혹은 미정이와 친구가 하는 걸 옆에서 보고 즐기려 했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그 것까지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궁금한 건 왜 녀석이 군대에 간다는 이유로 미정이를 버리려 했느냐는 것이었는데 학교에 애인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석연치 않았다. 몸뚱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게 문제가 된 듯 한데...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건 미정이가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려 했다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민현규를 옭아매려 했을지도...
“미정이가 너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은 어떻게 알았지? 그 애가 그렇게 이야기 했어?”
“처음엔 저한테 마음을 전혀 열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거 있잖아요. 조숙하고 도도한 여학생 분위기... 그런데 몇 번 잠을 잔 뒤에는 거의 매일 전화를 하다시피하고 또 편지 같은 걸 보내고...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자기가 스무 살이 된 후에도 코치님과 연인 사이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군대에 갈 때까지 계약을 하고 만난 사이라는 건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더군요.“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도착했고 난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라 녀석에게 권한 후 다른 컵에 한 잔을 가득 채워 원 샷을 했고 간짜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요즘은 낮에도 술을 한 잔 걸쳐야지... 맨 정신으로 있으면 우울해져.. 씨발..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하는 일 없이 있으려니...”
“복직 안하세요? 형님...”
“모르겠다. 이제 휴직한 지 두 달 밖에 안됐는데... 천천히 생각해야지... 근데 니 친구들은 여자도 서로 넘기고 그러냐? 난 통 이해가 안간다... 자기 여자 남이 쳐다만 봐도 성질나고 그러지 않나?”
“그... 그 놈하고는 소시 적에 많이 놀던 사이라...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러곤 했어요. 같이 가출한 여자애들 꼬셔서 여관 같은데서 술 진탕 먹여 놓고 정신없을 때 파트너 바꿔가면서 논 적도 있고요. 미정이를 그 놈한테 이야기했더니 계속 졸라 대서 그만...”
“으응?.. 잘났다.. 참... 짜장 부르튼다. 먹어.”
정재희에게 들은 이대 이 커플 섹스 이야기를 해서 녀석을 좀 압박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놈은 약간 자랑을 하 듯 무용담을 털어 놓고 있었고 미정이가 코치님으로 만난 민현규가 새 차를 타고 다니고 병원비 몇 백을 선뜻 내줄 정도의 재력이 있으며 밤에 그런 사이가 됐다면 충분히 이 녀석에게 집착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능한 이야기였다.
“유선미는 어떤 식이었지? 이왕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해봐라... 나도 좀 배우자.. 난 맘에 드는 애가 있어도 한 번 먹기가 그렇게 힘들던데... 넌 왜 그리 쉽냐? 씨발...”
“아... 선미요? 처음에 여기 면접 왔을 때 대충 이야기해보니 알겠던데요. 저녁 6시 까지만 일하라고 하고 월급은 한 달 60만원 준다고 했더니 더 늦게까지 하고 더 받을 수도 있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돈이 필요한 사정을 물었더니... 다이어트 약을 통신 판매로 샀는데 150만원 정도 빛이 있대요. 아빠가 알면 맞아 죽는다고...
70만원 주기로 하고 일단 출근을 시킨 뒤에 일 하면서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죠. 1년 정도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석 달 전에 헤어졌다더군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였는데 그 쪽에서 결혼까지 생각하는 듯해서 싫다고 했다는 것 같아요.
150만원 주면 내 애인 할래 하고 장난하듯 물었더니 정말이냐고 되묻더군요. 사장님은 유부남인데 그래도 되냐고 제 걱정까지 하고...
어제 아침에 은행에서 150만원을 찾아와 오후 한가한 시간에 그 애에게 주면서 앞으로 석 달 동안 내 애인 할 거면 이 돈 니 거라고 했어요. 얼굴이 빨개지면서 받더니 저녁에 차 태워 모텔 앞에다 주차시켜도 아무 말 없이 같이 들어가던걸요.“
“니가 돈이 많긴 많은가보다. 150만원 정도는 부담 없이 쏘는 걸 보니...”
“그 정도 여유는 있어요. 150만원 주고 석 달 동안 여대생 품으면 되죠. 그리고 돈 맛을 본 여자애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도 어렵지 않게 데리고 잘 수 있어요. 공짜로 데리고 자려고 하는 놈들보다는 그래도 인간적 아닌가요?”
어찌 보면 민현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여자한테 사기 쳐서 돈 뜯고 몸 버리게 하는 놈들도 많은 세상이니까...
“그래? 여대생 맛보니 좋디?”
“형님두... 그 게 그거죠. 뭐... 그래도 선미는 남자랑 잔 지 석 달이 돼서 그런지 몰라도 많이 느끼는 것 같던데요.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어요.”
녀석이 점점 자연스럽게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쉽게 사연들을 털어 놓고 있었고 난 미정이를 친구 방에 밀어 넣었을 때 스토리가 다시 궁금해졌다.
“현규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라. 나도 여자랑 놀 만큼 놀아본 놈이니 걱정 말고... 분위기 좋은 데 설마 내가 널 이해 못해서 난리 칠 일 없을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예... 알겠습니다. 형님.. 물어보세요. 다 말할게요.”
“미정이를 니 친구에게 넘겼다던 그 날... 너랑 니 친구랑 그 애를 같이 건드린 거 아니냐? 왜 그런 거 있잖아. 둘이서 여자 한명하고 즐기는 거...”
“아.. 그 때요... 미정이는 그렇게까지 섹을 밝히는 아이는 아니여서... 그러기 힘들죠. 친구 놈도 그 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녀석은 미정이를 계속 데리고 놀고 싶어 했으니까요.”
갑자기 이 녀석이 마약이나 최음제 종류의 약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재희와 모텔에서 이대 이로 즐겼다는 그 날도 정재희는 술에 너무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다고 이야기를 했었고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었는데...
하지만 향정신성의약품이나 마약류를 민현규가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 털어놓게 만드는 일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 건 죄질이 너무 무거워 사용, 취급, 제공자 모두가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이고 아무리 녀석과 내가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조금 친해졌지만 직접적인 증거 없이 입에 담게 되면 갑자기 어색해 질 것이다.
장난식으로 한 번 떠볼까하다가 핸드폰 사진하고 캠코더 녹화 분을 녀석이 보는 앞에서 깨끗이 지워 주고 저녁 때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제안을 거절한 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지고 매장을 나섰다.
“정재희에게도, 선미아빠나 니 마누라한테도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는 하지 않으마. 그럼 넌 당분간 선미와 즐길 수도 있고... 얼마 뒤에 정재희의 어머니가 회복되면 그녀와의 사이도 가능하겠지...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는데... 약 같은 건 사용하지 말고 몸만 섞어라. 만약 내가 갑자기라도 다시 이곳에 와서 정재희나 유선미에게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그 때는 용서 없다.“
"걱정마세요. 그런 건 안해요. 형님."
그 곳을 나와 내 차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자니 가을 오후 파아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미정이가 생각났다. 미정이는 중학생 시절 상처받기 쉬운 나이에 수영부 코치였던 교생 녀석에게, 그것도 자신의 첫 남자에게 버림받은 것도 견뎌냈다. 그런데 왜 나와의 관계에서 자살을...?
민현규는 돈을 이용해 어떻게 보면 아주 쉽게 여자들을 허물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암컷은 수컷보다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유사 이래 끊임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생존의 도구로 몸을 이용해왔고 지금도 돈이라는 생존 수단을 위해 여성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걸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민현규 같은 남자들도 마찬가지... 원래 세상은 그런 거니까...
최소한 녀석이 정재희에게 월급 외에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를 취한다면 그걸 억지로 말릴 권리는 내겐 없었고 그래도 겉에서만 바라본 민현규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해보니 녀석이 돈보다 여자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 나름대로의 주관에 의해 움직이는, 괜찮은 구석도 찾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싶었다.
정재희에게 전화를 해서 휴직기간은 끝나 가는데 민사장과 아르바이트 여대생은 그동안 계속 지켜봤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과 아무래도 민사장과 있었던 일은 우연인 것 같고 그 동안 고민해봤지만 남녀의 사랑문제에 끼어드는 건 아무리 내가 경찰이긴 해도 내키지 않으니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매장으로 출근해서 당분간이라도 일을 계속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전에 근무하던 경찰서에 가서 마무리 할 게 있어서 잠시 이 곳을 떠날 거라고 이야기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데다 실마리는 끊겨 있었고 오후 내내 장터 주변 공원을 서성이며 망설이던 나는 광양을 떠나 남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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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후 황지연에게 문자를 했다. 내가 먼저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김유미와 일요일 저녁 술자리가 끝난 후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을 지나는 동안 이유성과 그녀 사이에 벌어졌음직한 시나리오를 생각했었고 황지연의 상태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뭐해? 주중에 한 번 볼 수 있어?]
[주중에요? 내일이나 모레는 가능해요. 오늘은 좀 힘들구요.]
[응. 어디서 볼까?]
[내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올래요? 시간은 한 9시쯤...]
강원도에서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난 모르는 척 물었다.
[응. 괜찮긴 한데... 왜 선약이 있어? 너무 늦지 않아?]
[업무가 좀 밀려서요. 집에서 밥 해먹게 저녁 먹지 말아요.]
[뭐 하러 그래.. 그냥 밥 사먹으면 되지... 피곤하잖아...]
[아니요. 그냥 해 먹어요. 저 요리 꽤 하거든요. ㅎㅎ]
내가 그 곳에서 자면 새벽에 직장으로 가려는 걸까? 부담이 될 텐데...
[혹시 다음 날 출근이면 주말에 봐도 괜찮아. 무리하지 마]
[괜찮아요. 목요일 휴가 낼 거예요.]
황지연은 아직 날 보고 있었고 내 제안에 대한 반응도 기대 이상이었지만 난 그녀를 믿지 않고 있었다. 이유성과의 관계를 끊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는 어디로 날아가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다음 날 밤 9시... 난 황지연의 아파트 입구에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는 입구를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몇 분 지나지 않아 황지연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양 손에 장바구니와 비닐 봉투를 들고 아파트 현관 문을 향해 뛰어 왔다.
“언제 왔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 우산은 어쩌고? 이리 줘.”
난 그녀의 오른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건네받고 나서 우리는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주차장 입구가 우산 쓰기는 좀 애매한 거리에 있어요. 이 정도 비는 그냥... 호호”
“응. 업무는 다 끝내고 왔어?”
“그럭저럭이요. 배고프죠?”
“조금... 참을만해.”
신혼부부가 나눔직한 이야기 들이 오고 갔고 그녀와 나는 15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그녀에게 밖에서 조금 기다릴까 하고 물었는데 지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안방으로 가더니 문을 닫지 않은 채로 정장 형식의 짙은 남색 투피스를 벗고 노란색 7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는데 날 의식하지 않는 듯 움직이는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뒤에서 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옷을 갈아 입은 그녀가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난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2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김치찌개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자 난 거실로 들어가 그녀에게 물었다.
“김치찌개야? 맛있겠다.”
“간단히 하려구요. 다른 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응.. 냄새 맡으니까 갑자기 엄청 배고파지는데...”
“잠깐만요. 10분이면 돼요.”
“밥 먹고 영화 볼래? DVD 빌려올게.”
“영화요? 예전엔 많이 봤는데...”
지연이 말끝을 흐린다. 하긴 이유성과 사이가 소원해지고 나서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 가슴 아팠을 것이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
“술 있어? 나가서 소주 사올까?”
“있어요. 냉장고 안에 세 병. 베란다에 몇 병 더 있어요.
난 지연과 술 마시고 섹스 하는 것 외에는 같이 나눌 게 없을까? 그녀는 내게 술을 같이 마셔주고 안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까? 내가 그녀가 원하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어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이유성을 밀어내기 위해 날 향해 움직이지만 그 녀석과 완전히 남남이 되는 그 순간에 지연이 내가 있어 주길 바라는 곳이 어디쯤인지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식사하세요.”
어느 새 식탁위에는 먹음직스러운 고등어구이와 계란말이가 김치찌개와 함께 차려져 있었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지연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와 잔을 채워주며 웃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죠? 맛있게 드세요..”
“응... 군침 넘어간다. 잘 먹을게.”
그녀가 반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내 밥공기는 바닥을 보고 있었고 한 그릇을 더 받아 순식간에 다시 비웠다.
“이거.. 찌개 맛이 예술인데... 요리 좀 한다는 거 진짜인 것 같아. 원래 고수는 평범한 음식을 잘 하는 건데...”
“호호.. 그렇게 맛있게 드시니 기분이 좋네요. 특별히 담에 또 해 줄게요”
“황송하지... 이런 김치찌개면 일 년 열두 달 먹어도 안 질리겠는 걸..”
술이 몇 잔 오고 간 후에 지연이 묻는다.
“오늘 몇 시까지 있을 수 있어요?”
“자고 가도 돼. 쫓아내지만 않으면...”
“잘 됐다. 호호.. 물어볼게 있어서요.”
“응?.. 왜 그래.. 저번처럼 이상한 거 묻기 없이...”
난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물어볼 게 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고 만약 내 시각이 궁금한 게 있다면 쉬운 질문 일리 없다.
“아저씨가 볼 때는 그 동안 내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힘들어 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 걸 판단하는 데 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물어봐도 좋아요. 모르는 걸 제외하고는 알려 드릴게요.”
아... 이건 뭐냐? 저번에도 이상한 질문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더니... 왜 그런 걸 내게 묻는 거지? 그리고 이제 내게 모든 걸 오픈하다는 이야기인가? 자신이 경찰이라는 것마저도...
“응?.. 그 이유를 나한테 묻는 게 어딨어? 내가 무슨 심리학자도 아니고... 저번에 니 나름대로 이유를 찾은 것 같은데... 그리고 설마 그 걸 내가 알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요. 아저씨는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래봬도 저... 기억력이 좋아서 아저씨가 한 말들 대부분 다 기억해요. 처음 만난 날 아저씨는 한 때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닌가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 못한다고... 근데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아저씨를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 전 아저씨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잘 읽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로 우리 아빠의 생각을 읽기도 하고... 그리고 민망한 이야기지만 절 처음 봤을 때 제가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아저씨는 알고 있었어요. 우리 아빠도 그래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선 자신을 최대한 숨기죠. 그래야 사람들이 무언가를 드러내고 그럼 만약에 생길지도 모르는 어떤 관계에서 유리한 곳을 점령할 수 있다고 했어요.
아빠에게 지금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뭔지 물어볼 수는 없어요.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주관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죠.
자. 말해줘요. 전 지난 며칠 동안 아저씨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것들을 입속으로 되뇌면서 지냈어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래 그런 일이 내게 생겼을 뿐이다. 그래요. 그렇게 조용히 며칠이 지나갔어요. 하지만 아저씨라면 무언가를 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에 대한 걸 알고 싶다면 어떤 질문이라도 해도 좋아요. 그리고... 아무리 뻔한 이야기를 해도 화내지 않을 거고 우리 관계도 이대로 계속될 거라는 것도 약속할게요.
하지만...“
“하지만? 또 뭐?”
“제 문제에 대한 아저씨의 견해에 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룰 줄 아세요.”
제대로 걸렸다. 지연은 빠져 나갈 구멍을 막아버린 채 나를 압박했고 내 머리는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무언가 답을 찾고 있었다.
“그 대가라는 게 널 안지 못하는 거야?”
“모르겠어요. 아마 안는다고 하더라도 아저씨에게 열린 마음의 문이 닫힐 거예요.”
역공이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지금 그녀에게 내가 김유미에게 들은 이유성의 마공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한다 해도 내게 들은 것만으로 지연이 스스로 흐름을 돌릴 수 있을 거라는 감이 아직 오지 않는다.
손자병법은 비겁의 철학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기지 못할 싸움을 시작해선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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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업데이트가 느린 이유는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일도 많고.. 휴가에... 이해해주시길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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