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보던 시선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여기 있네요. 어디 조용한 곳에 가셔서 보여 드릴게요. 어디가 좋을까?..... 저기 카페 어때요? 괜찮겠어요?”
민현규의 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난 천천히 길 건너에 있는 작은 단층 건물 카페로 걸어가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한 마디를 더 건넸다.
“저와 이야기하기 싫으시면 그냥 가셔도 되요. 전 그냥 영이에게 사실을 말하고 사진을 보여주면 되니까요. 내가 그쪽을 먼저 만난 건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전후 상황을 좀 알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난 후에 영이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보려구... 직업이 경찰관이긴 해도 남녀문제는 함부로 끼어들 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그곳에서 30m 쯤 떨어진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없는 귀퉁이 좌석에서 난 커피를 그녀는 오렌지 쥬스를 시켰고 마주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 두 분이 505호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전 504호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 크게 들리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정사를 하는 소리도 들었으니 그쪽이 다른 핑계를 대고 서로 실랑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분이 모텔을 나설 때 사진도 찍어 두었으니 간접적인 증거는 충분해요... 여기 있어요.”
난 그녀 앞으로 내 핸드폰을 들이 밀어 사진을 보여줬고 눈동자가 커져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다시 핸드폰을 내 쪽으로 끌어오며 말을 이어갔다.
“며칠 전에 매장에 가서 모자를 사는 척 하며 그쪽을 봤어요. 그 땐 그냥 영이 신랑인 민사장의 뒤를 좀 캐보려다가 우연히 가게에 들린 거지만 첫인상이 왠지 끌리더군요. 그냥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이기도 하고... 어제 많이 놀랐어요. 당신이 민사장과 그런 사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두 사람... 사랑하는 사이인가요?“
“예?... 아... 아니..예요.”
약간 얼굴을 붉히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라구요? 음... 그쪽 이름이 뭐죠? 나이는요?”
“정...재....희... 서른 여... 섯...”
난 그녀의 외모에 비해 나이가 많음에 놀라고 있었다. 그럼 민현규와 8~9살 차이란 말인데...
“좋아요... 정재희씨... 제가 보기엔 유부녀 같은 데 왜 자신이 일하는 매장의 사장과 그런 사이가 된 거죠? 아이와 남편이 있다면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요... 제가 처음 본 정재희씨 이미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실은... ”
그녀가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더 불리해져요. 제 입장에서 당신에게 무언가 들을 게 없다고 판단되면 영이에게 가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도 되겠어요?”
“실은... 이혼녀예요... 이혼한 지 1년쯤 됐어요. 아이 아빠는 지금 재혼을 해서 광주에 살고 전 엄마, 딸아이하고 살고 있어요...”
그 말을 하고 정재희는 목이 탄 지 점원이 가져온 쥬스를 조금 마신 후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결혼하기 전에는 보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혼 후에 다시 자리를 알아보니 보수도 너무 짜고 젊은 후배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다시 말이 끊겼고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난 그녀를 재촉했다.
“그런데요?.. 민사장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죠? 매장 직원을 뽑는다고 해서 면접을 보며 처음 만났나요?”
“그게... 아이 신발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현규가 중학교 시절에 학원에서 수학을 제게 배웠는데 선생님하며 알아 보더군요. 그래서 연락처를 주고 받았는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왔어요. 직원이 그만 두게 돼서 그러는데 같이 한 번 일해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마침 저도 장사를 좀 배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보수도 괜찮아서... 그만... 그러기로 했는데...”
정재희에게 흐르는 당당한 분위기는 학원이지만 교육자여서 그랬나? 어쨌든 학원 선생님도 선생님인데... 민현규라는 놈이 먼저 연락을 해서 제안을 했고 지금은 내연관계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걸 감안해보면 난 그 때 민현규가 괴물로 보였다. 교생으로 가서는 중학교 학생과 같이 붙어먹고 사회에 나와서는 학창시절 학원 선생과 붙어먹는다니...
문제는 어떤 방법이냐는 건데... 미정이와의 관계를 푸는 실마리가 있을지 모르니 알아내야 했다. 외모가 많이 준수해졌고 돈이 받쳐주는 것 외에 무언가가 또 있을 것이다.
“그랬는데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됐죠?”
그때 정재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고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응.. 우리 딸...”
“엄마... 조금 늦어... 기다리지 말고 밥 먹어..”
“아니.. 가게 손님이 많아서 그래.. 정리하고 갈게... 그래...”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의 얼굴 표정이 변했고 약간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정말 죄송해요..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가게를 그만둘게요... 그냥 못 본 걸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한테 죄송할 건 없어요. 못 본 걸로 해주고... 가게를 그만 두신다... 그게 ...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가게를 그만 두신다고 하면 민사장이 그냥 그러라고 할까요? 두 사람 어쨌든 내연의 관계 아닌가요?”
“그건... 제가... 현규에게 이야기 잘 하면 될 거에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요. 제가...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게요...”
난 차갑게 그 말을 잘랐다.
“안됩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지 알아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제가 왜 정재희씨를 믿어야 하죠? 정재희씨는 그렇게 말하지만 전혀 다른 진실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요? 전후 사정을 솔직히 말하신다면... 그럼... 제가 한 번 생각을 해보지요.”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는지... 현규는 중학생 때 봐서 어린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해본 일이 벌어졌어요... 내가 미쳤었나봐요..”
“무슨 말 이죠?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차분히 마음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세요.”
정재희는 자기 앞에 놓인 쥬스를 들어 조금 마신 후에 숨을 고르는 듯 잠시 동안 조용히 있었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난 천천히 흩어 보았는데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얼굴과 풍만한 가슴이 남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듯 했고 당시 난 미정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별다르게 여자 생각이 나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빌미로 이 여자를 협박해서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날 정도 였다.
그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쯤 됐을 때였어요. 그날이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민사장이... 현규가... 오후에 이월상품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대금을 현금으로 주기로 했다고 금전등록기 안에 있는 봉투를 확인하라더군요. 급한 일이 있어서 하동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열어 보았더니 돈이 많았어요. 평상 시 현금은 천원 지폐가 대부분이고 다해도 10~15만원 정도 였는데 봉투 안에 10만원 수표가 74장이 있더라구요. 740만원. 통장으로 보내지 왜 현금으로 주냐고 물었더니 지점 창고에 있는 이월 상품을 거래하는 거라 통장 내역을 남기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후 내내 혼자서 매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물건이 안 오기에 매장 문을 잠그고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오래 걸리지 않고 불과 3~4분 정도 자리를 비웠는데 와보니 매장 문이 열려있고 금전등록기 안에 있는 현금이 모두 없어졌어요. 옷이나 신발들도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널부러져 있는 게 도둑이 들었구나 싶더군요. 어안이 벙벙해서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데... 이월상품 물건을 실은 차가 도착을 했어요. 그때가 5시 정도 였고... 기사가 내리더니 매장을 둘러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더니... 바로 민사장에게 전화를 하더라구요. 통화를 하던 중에 절 바꿔줘서 현규에게 도둑을 맞은 것 같다고 했더니 지금 가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서...
잠시 후에 현규가 도착했고 저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하기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이렇게 됐다고 했어요. 현규는 한참동안 문을 살펴보고 금전등록기 주변과 없어진 물건들을 살펴보다 트럭 기사분과 나가서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에 있는 직원분과 한참 통화를 했지만 이월상품은 내리지 않고 트럭이 떠나버렸어요.
그런데 현규가 어딘가에 계속 전화를 걸더니 갑자기 매장 문을 닫고
저하고 함께 광주에 가자고 하더라구요. 물류창고 직원 분을 만나 물건을 다시 보내주고 대금 결재를 조금만 늦춰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데 누나가 있는 게 부드러울 것 같다고...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그건 낼 아침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새학기 맞이 세일 한다고 전단 광고를 뿌려놨으니 이월 상품 확보 못하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고 했어요.“
난 정재희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민현규와 관계가 시작됐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고 이미 다 털어놓으려고 마음을 굳힌 듯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표정은 더 차분해 지고 있었다.
“광주 상무지구에 있는 일식집에서 그쪽 직원을 만났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었어요. 20대 후반쯤... 민사장은 연신 사정 한번만 봐달라고 세일기간이 끝나면 바로 현금으로 줄테니 물건을 좀 달라고 했고 그 사람은 결재 안 된 금액이 아직도 2,500만원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사람만 보고 다른 데서 달라는 것도 마다하며 보냈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 큰 소리 쳤어요. 현규는 그 사람이 호통을 치자 꼼짝도 못하고 술을 연거푸 들이키고 저는 중간에서 미안해 죽겠더군요. 그 돈을 도둑맞지만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어쨌든 그러는 와중에 그 사람이 술을 따라주는 걸 거절하지 못해서 몇 잔 마시다보니 저도 취기가 올라왔어요. 현규가 잠깐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 사람이 자꾸 미인이시라고 현규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물으면서 살갑게 굴면서 자꾸 술을 따라주기에... 저는 매장직원인데 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한번만 사정을 봐주시라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시고 따라주고 또 받고... 그러다 그 사람이 조금 누그러질 기미가 보여 현규가 노래방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자고 제안을 했고 근처 노래방에 갔는데 맥주를 마시면서 셋이 취해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 사람이 부르스를 추며 몸을 더듬더군요. 그 때 완강히 거부했어야 하는데 분위기를 깰수가 없어서... 그러면서 따라주는 맥주를 계속 마시다 보니 그만.. 취해버렸어요. 원래 술이 그렇게 센 편이 아니라... 그러다 필름이 끊긴 채 잠이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모텔이었는데... ”
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자가 이야기하기는 만만치 않은 내용이다. 괜히 이야기하는 리듬을 깨기 싫어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니 정재희가 나와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제 옷이 모두 벗겨져있고 누군가 몸 위로 올라와 있었어요.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서... 머리도 많이 아프고... 이미 그 사람이 제 몸 안에 들어와 버린 터라 돌이킬 수도 없었어요.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근데...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게...”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울먹이기 시작했다. 강간을 당했다고 우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궁금했던 나는 침착하게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자. 진정하시고 목 좀 축이세요... 그게 누구였죠?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 직원이던가요?”
“저...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서 빨리 일이 끝나면 조용히 일어나 가려고 했어요. 이런 일이 있을지는 몰랐지만 제 실수로 생긴 일이라 이 사람한테 어떻게든 사정하려 했었으니 740만원이 작은 돈도 아니고... 제 몸으로 때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안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눈을 뜨지 않고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그게... 제 몸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어...요... 쉴 새 없이 남자는 몰아치고.... 전 그 사람 몸을 껴안고 매달렸어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무의식중에 눈을 떠 남자를 보았는데... 그건 현규.... 현규였어요.”
“예?..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전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규를 바라보았는데 현규는 섹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저를 보지 않았어요. 결국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현규가 자신의 사정을 했어요. 전 그 이불을 끌어다 몸을 가린 후에 현규에게 물었어요. 현규야. 너랑 내가 왜?... 그런데...현규가... 민사장이... 누나... 미안해요... 하면서 무릎을 꿇더니 필름이 끊어진 때부터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제가 필름이 끊긴 채 노래방에서 잠이 들자 그 사람이 현규에게 제가 너무 마음에 든다면서 절 놔두고 가면 자기가 내일 아침에 이월상품을 보낼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근데 현규는 물건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대요. 그러다 그 사람과 몸 싸움을 하게 되고... 그 동안 신세 진 것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거래를 해야 되는 사이라 때릴 수는 없어서 그냥 일방적으로 맞고 그러던 와중에 옷도 찢기고... 그 사람이 현규를 때리다 노래방 주인이 오고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 갔는데 그 때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날 업고 모텔로 오게 됐대요. 내가 오바이트를 해서 옷이 지저분해진터라 옷을 벗기다가 너무 예뻐보여서... 중학교 때부터 몰래 짝사랑하기도 했었다고... 그렇게 이성을 주체할 수 없었다더군요.
민사장 얼굴이 여기저기 부어 있었고 옷이 찢겨 있었어요. 제 옷도 오물이 묻어 이상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저를 그 사람한테 지키려다가 그랬다는 데... 그리고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제가 매장을 보고 있을때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러긴해도 그 때가 새벽 4시였는데 옷도 엉망이고 몸도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현규에게 씻고 옷을 입은 후에 부를 테니 방에서 나가달라고 했어요. 일단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민사장이 나간 걸 확인하고 겉옷을 챙겨들고 오물을 닦고 샤워를 하고 옷을 벗은 채로 욕실에서 나왔는데...
아마... 민사장이 카운터에 가서 잠깐 나온 사이에 문이 잠겼다고 보조키로 열어달라고 했나봐요. 밖에서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팬티만 입은 채로... 그리고 저에게 달려들며 말했어요... 누나... 누나 몸이 너무 생각나서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고... 전 완강히 거부하려 했지만... 알몸인데다... 그게... 돈 도둑맞은 건 자기가 다 책임을 진다는 말에 약해져서...그만... 아침까지... 계속...”
“아.. 됐어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죠?”
“현규가... 아니 민사장이 어떻게 했는지 이월 상품이 다시 와서 세일은 잘 끝냈어요. 세일이 끝나는 날 술을 한 잔 하자고 해서 그 날도 그만... 그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민사장 말로는 영이가 아이가 어리다고 관계를 자꾸 거부해서 누나 생각이 자꾸 난다고... 그렇게 6개월 정도가 흘렀네요. 그런데... 두 달쯤 전부터 민사장이... 자기 친구 커플이 있는데 같이 만나자고 졸라서... 그 것만은 싫다고... 거부했어요. 그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막가는 것 같아서... 하긴 지금도... 그렇지만...”
친구 커플? 그 때 불고기집의 그 커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프는 와이프대로 두고 내연녀를 이용해서 재미를 보겠다? 쾌락의 끝을 보기위해 달려드는 녀석이다.
“그럼 커플과의 관계는 안한다니까 그렇게 한다던가요?”
“그게... 민사장이 자꾸 졸라도 제가 안한다니까 그럼 알았다고 하더니... 며칠 동안 저를 피하더군요. 낮에도 잠깐 쉴 사이도 없이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우고 저녁 때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면서 문 닫을 시간까지 연락도 없이 오지 않고... 아이 때문에 저녁 7시에는 집에 가서 저녁도 준비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다 일주일 만에 술을 한 잔 마시자기에 저녁에 매장 문을 좀 일찍 닫고 회를 먹으러 갔어요. 현규가 그 동안 미안하다고 누나가 많이 서운했을 거라고 해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술을 먹고 잠깐 쉬었다 가자고 해서 따라 갔는데 가본 적이 없는 최신식 모텔이었어요. 전 술이 많이 취해서... 왜 그런지 평소만큼 마신 것 같은데 그 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요. 그냥 평소처럼 섹스를 하는 줄 알았는데... 민사장 친구가 같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남자가 2명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절 만지는 것 같았어요... 그 땐 술이 너무 취해서 그냥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 겠지 하고 새벽녁에 정신이 들어 모텔을 나오기는 했는데...”
“그런데요? 뭐가 또 있었나요?”
“2~3일 후에 현규가 그러더군요. 그 날 누나는 술에 취해 잘 몰랐던 것 같은데... 자기 친구가 같이 있었다구요. 친구 애인도 함께 있었고... 무슨 소리냐고 난 전혀 기억이 안난다고 했지만... 저한테 동의를 구했는데... 그래도 된다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근처에 있던 친구 커풀을 불렀다고... 그게 알게 모르게 4명이 서로 커플로 많이 즐긴대요. 물론 믿을만한 사람들끼리... 전 민사장한테 화를 내고 매장을 그만둔다고 했어요. 하지만...”
“예...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누나가 그렇게 싫어할 줄 알았다면 안했을 거라고 사과하더군요. 그리고 예전에 돈을 도둑맞은 것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면서... 그 것도 빨리 갚으려고 열심히 노력중이라고... 자긴 나름대로 누나한테 피해 안주려고 그러는데 누나는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하지만 점점 매출이 오르고 있으니 다음 달부터 누나 월급도 올려주려고 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자꾸 사정을 이야기하면 약해지더군요... 저도 애 아빠한테 위자료 받은 게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월급도 많고 아이나 어머니 가져다주라고 세일 상품 같은 것도 많이 챙겨주고 해서... 그런 짓은 일단 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았었는데... 며칠 전에도 유혹을 하더군요. 그렇게 한 번 같이 어울려주면 그 때마다 20만원씩 보너스를 주겠다고... 일단 한 번 거절은 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던 중이었어요. 영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정재희가 그 말을 하며 내 눈을 쳐다보았다. 영이가 뒷조사를 시켰을 줄은 꿈에다 몰랐다는 의미로 보였다. 나는 오른 손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결국 고민은 이 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가였다. 어떻게 보면 경찰 앞에서 진술하듯이 털어놓은 이 이야기를 한 정재희는 자신이 유리하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건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민사장과의 관계에서 정재희는 얼마나 성적 쾌락을 느끼고 있는지... 남편보다 훨씬 젊고 단단한 체구의 민현규를 정재희가 더 놓치기 싫어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월급이나 부수익도 생긴다면 더더욱... 또 궁금한 건 정재희 말이 다 사실이라면 그냥 강간 비슷한 걸 당했다라는 표현을 쓰면 되는 데 왜 반응을 했다는 표현을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여자 잎에서 나오기는 쉽지 않은 말인데...
이런 저런 의혹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난 결정을 해야 했다. 무언가를... 30여분이 지난 후에야 난 입을 열었다.
“아까 민사장에게 이야기하면 가게를 그만둘 수 있다고 이야기 하셨지요? 그게 가능한가요?”
“모르겠어요. 사정을 해 봐야지요. 갑자기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저번에도 분명히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이야기했었고...”
“아니... 가게를 그만두면 생계유지가 가능하신가 해서요. 아이도 있으신데...”
“위자료 받은 게 있어서 당분간은... 장사밑천으로 남겨 놓은 돈이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재희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혹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항상 느끼고 살아왔을 터... 그녀는 분명 매력이 있었다. 정재희는 내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게 되면 그 사실을 밝힐 가능성이 적어진다고 느낌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혼녀이고 누구의 여자도 아니니 민현규가 아닌 나와 관계를 맺는 다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난 정재희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그 방법은 내키지 않았다. 당시 미정이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면죄부를 받기 전에 누군가를 안는다는 것이 내심 겁이 났는데 하늘에서 미정이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 있네요. 어디 조용한 곳에 가셔서 보여 드릴게요. 어디가 좋을까?..... 저기 카페 어때요? 괜찮겠어요?”
민현규의 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난 천천히 길 건너에 있는 작은 단층 건물 카페로 걸어가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한 마디를 더 건넸다.
“저와 이야기하기 싫으시면 그냥 가셔도 되요. 전 그냥 영이에게 사실을 말하고 사진을 보여주면 되니까요. 내가 그쪽을 먼저 만난 건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전후 상황을 좀 알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난 후에 영이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보려구... 직업이 경찰관이긴 해도 남녀문제는 함부로 끼어들 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그곳에서 30m 쯤 떨어진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없는 귀퉁이 좌석에서 난 커피를 그녀는 오렌지 쥬스를 시켰고 마주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 두 분이 505호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전 504호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 크게 들리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정사를 하는 소리도 들었으니 그쪽이 다른 핑계를 대고 서로 실랑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분이 모텔을 나설 때 사진도 찍어 두었으니 간접적인 증거는 충분해요... 여기 있어요.”
난 그녀 앞으로 내 핸드폰을 들이 밀어 사진을 보여줬고 눈동자가 커져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다시 핸드폰을 내 쪽으로 끌어오며 말을 이어갔다.
“며칠 전에 매장에 가서 모자를 사는 척 하며 그쪽을 봤어요. 그 땐 그냥 영이 신랑인 민사장의 뒤를 좀 캐보려다가 우연히 가게에 들린 거지만 첫인상이 왠지 끌리더군요. 그냥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이기도 하고... 어제 많이 놀랐어요. 당신이 민사장과 그런 사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두 사람... 사랑하는 사이인가요?“
“예?... 아... 아니..예요.”
약간 얼굴을 붉히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라구요? 음... 그쪽 이름이 뭐죠? 나이는요?”
“정...재....희... 서른 여... 섯...”
난 그녀의 외모에 비해 나이가 많음에 놀라고 있었다. 그럼 민현규와 8~9살 차이란 말인데...
“좋아요... 정재희씨... 제가 보기엔 유부녀 같은 데 왜 자신이 일하는 매장의 사장과 그런 사이가 된 거죠? 아이와 남편이 있다면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요... 제가 처음 본 정재희씨 이미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실은... ”
그녀가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더 불리해져요. 제 입장에서 당신에게 무언가 들을 게 없다고 판단되면 영이에게 가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도 되겠어요?”
“실은... 이혼녀예요... 이혼한 지 1년쯤 됐어요. 아이 아빠는 지금 재혼을 해서 광주에 살고 전 엄마, 딸아이하고 살고 있어요...”
그 말을 하고 정재희는 목이 탄 지 점원이 가져온 쥬스를 조금 마신 후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결혼하기 전에는 보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혼 후에 다시 자리를 알아보니 보수도 너무 짜고 젊은 후배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다시 말이 끊겼고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난 그녀를 재촉했다.
“그런데요?.. 민사장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죠? 매장 직원을 뽑는다고 해서 면접을 보며 처음 만났나요?”
“그게... 아이 신발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현규가 중학교 시절에 학원에서 수학을 제게 배웠는데 선생님하며 알아 보더군요. 그래서 연락처를 주고 받았는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왔어요. 직원이 그만 두게 돼서 그러는데 같이 한 번 일해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마침 저도 장사를 좀 배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보수도 괜찮아서... 그만... 그러기로 했는데...”
정재희에게 흐르는 당당한 분위기는 학원이지만 교육자여서 그랬나? 어쨌든 학원 선생님도 선생님인데... 민현규라는 놈이 먼저 연락을 해서 제안을 했고 지금은 내연관계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걸 감안해보면 난 그 때 민현규가 괴물로 보였다. 교생으로 가서는 중학교 학생과 같이 붙어먹고 사회에 나와서는 학창시절 학원 선생과 붙어먹는다니...
문제는 어떤 방법이냐는 건데... 미정이와의 관계를 푸는 실마리가 있을지 모르니 알아내야 했다. 외모가 많이 준수해졌고 돈이 받쳐주는 것 외에 무언가가 또 있을 것이다.
“그랬는데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됐죠?”
그때 정재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고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응.. 우리 딸...”
“엄마... 조금 늦어... 기다리지 말고 밥 먹어..”
“아니.. 가게 손님이 많아서 그래.. 정리하고 갈게... 그래...”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의 얼굴 표정이 변했고 약간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
“정말 죄송해요..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가게를 그만둘게요... 그냥 못 본 걸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한테 죄송할 건 없어요. 못 본 걸로 해주고... 가게를 그만 두신다... 그게 ...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가게를 그만 두신다고 하면 민사장이 그냥 그러라고 할까요? 두 사람 어쨌든 내연의 관계 아닌가요?”
“그건... 제가... 현규에게 이야기 잘 하면 될 거에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요. 제가...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게요...”
난 차갑게 그 말을 잘랐다.
“안됩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지 알아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제가 왜 정재희씨를 믿어야 하죠? 정재희씨는 그렇게 말하지만 전혀 다른 진실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요? 전후 사정을 솔직히 말하신다면... 그럼... 제가 한 번 생각을 해보지요.”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는지... 현규는 중학생 때 봐서 어린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해본 일이 벌어졌어요... 내가 미쳤었나봐요..”
“무슨 말 이죠?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차분히 마음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세요.”
정재희는 자기 앞에 놓인 쥬스를 들어 조금 마신 후에 숨을 고르는 듯 잠시 동안 조용히 있었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난 천천히 흩어 보았는데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얼굴과 풍만한 가슴이 남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듯 했고 당시 난 미정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별다르게 여자 생각이 나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빌미로 이 여자를 협박해서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날 정도 였다.
그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쯤 됐을 때였어요. 그날이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민사장이... 현규가... 오후에 이월상품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대금을 현금으로 주기로 했다고 금전등록기 안에 있는 봉투를 확인하라더군요. 급한 일이 있어서 하동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열어 보았더니 돈이 많았어요. 평상 시 현금은 천원 지폐가 대부분이고 다해도 10~15만원 정도 였는데 봉투 안에 10만원 수표가 74장이 있더라구요. 740만원. 통장으로 보내지 왜 현금으로 주냐고 물었더니 지점 창고에 있는 이월 상품을 거래하는 거라 통장 내역을 남기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후 내내 혼자서 매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물건이 안 오기에 매장 문을 잠그고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오래 걸리지 않고 불과 3~4분 정도 자리를 비웠는데 와보니 매장 문이 열려있고 금전등록기 안에 있는 현금이 모두 없어졌어요. 옷이나 신발들도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널부러져 있는 게 도둑이 들었구나 싶더군요. 어안이 벙벙해서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데... 이월상품 물건을 실은 차가 도착을 했어요. 그때가 5시 정도 였고... 기사가 내리더니 매장을 둘러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더니... 바로 민사장에게 전화를 하더라구요. 통화를 하던 중에 절 바꿔줘서 현규에게 도둑을 맞은 것 같다고 했더니 지금 가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서...
잠시 후에 현규가 도착했고 저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하기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이렇게 됐다고 했어요. 현규는 한참동안 문을 살펴보고 금전등록기 주변과 없어진 물건들을 살펴보다 트럭 기사분과 나가서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에 있는 직원분과 한참 통화를 했지만 이월상품은 내리지 않고 트럭이 떠나버렸어요.
그런데 현규가 어딘가에 계속 전화를 걸더니 갑자기 매장 문을 닫고
저하고 함께 광주에 가자고 하더라구요. 물류창고 직원 분을 만나 물건을 다시 보내주고 대금 결재를 조금만 늦춰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데 누나가 있는 게 부드러울 것 같다고...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그건 낼 아침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새학기 맞이 세일 한다고 전단 광고를 뿌려놨으니 이월 상품 확보 못하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고 했어요.“
난 정재희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민현규와 관계가 시작됐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고 이미 다 털어놓으려고 마음을 굳힌 듯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표정은 더 차분해 지고 있었다.
“광주 상무지구에 있는 일식집에서 그쪽 직원을 만났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었어요. 20대 후반쯤... 민사장은 연신 사정 한번만 봐달라고 세일기간이 끝나면 바로 현금으로 줄테니 물건을 좀 달라고 했고 그 사람은 결재 안 된 금액이 아직도 2,500만원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사람만 보고 다른 데서 달라는 것도 마다하며 보냈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 큰 소리 쳤어요. 현규는 그 사람이 호통을 치자 꼼짝도 못하고 술을 연거푸 들이키고 저는 중간에서 미안해 죽겠더군요. 그 돈을 도둑맞지만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어쨌든 그러는 와중에 그 사람이 술을 따라주는 걸 거절하지 못해서 몇 잔 마시다보니 저도 취기가 올라왔어요. 현규가 잠깐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 사람이 자꾸 미인이시라고 현규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물으면서 살갑게 굴면서 자꾸 술을 따라주기에... 저는 매장직원인데 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한번만 사정을 봐주시라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시고 따라주고 또 받고... 그러다 그 사람이 조금 누그러질 기미가 보여 현규가 노래방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자고 제안을 했고 근처 노래방에 갔는데 맥주를 마시면서 셋이 취해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 사람이 부르스를 추며 몸을 더듬더군요. 그 때 완강히 거부했어야 하는데 분위기를 깰수가 없어서... 그러면서 따라주는 맥주를 계속 마시다 보니 그만.. 취해버렸어요. 원래 술이 그렇게 센 편이 아니라... 그러다 필름이 끊긴 채 잠이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모텔이었는데... ”
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자가 이야기하기는 만만치 않은 내용이다. 괜히 이야기하는 리듬을 깨기 싫어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니 정재희가 나와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제 옷이 모두 벗겨져있고 누군가 몸 위로 올라와 있었어요.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서... 머리도 많이 아프고... 이미 그 사람이 제 몸 안에 들어와 버린 터라 돌이킬 수도 없었어요.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근데...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게...”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울먹이기 시작했다. 강간을 당했다고 우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궁금했던 나는 침착하게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자. 진정하시고 목 좀 축이세요... 그게 누구였죠?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 직원이던가요?”
“저...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서 빨리 일이 끝나면 조용히 일어나 가려고 했어요. 이런 일이 있을지는 몰랐지만 제 실수로 생긴 일이라 이 사람한테 어떻게든 사정하려 했었으니 740만원이 작은 돈도 아니고... 제 몸으로 때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안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눈을 뜨지 않고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그게... 제 몸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어...요... 쉴 새 없이 남자는 몰아치고.... 전 그 사람 몸을 껴안고 매달렸어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무의식중에 눈을 떠 남자를 보았는데... 그건 현규.... 현규였어요.”
“예?..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전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규를 바라보았는데 현규는 섹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저를 보지 않았어요. 결국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현규가 자신의 사정을 했어요. 전 그 이불을 끌어다 몸을 가린 후에 현규에게 물었어요. 현규야. 너랑 내가 왜?... 그런데...현규가... 민사장이... 누나... 미안해요... 하면서 무릎을 꿇더니 필름이 끊어진 때부터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제가 필름이 끊긴 채 노래방에서 잠이 들자 그 사람이 현규에게 제가 너무 마음에 든다면서 절 놔두고 가면 자기가 내일 아침에 이월상품을 보낼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근데 현규는 물건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대요. 그러다 그 사람과 몸 싸움을 하게 되고... 그 동안 신세 진 것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거래를 해야 되는 사이라 때릴 수는 없어서 그냥 일방적으로 맞고 그러던 와중에 옷도 찢기고... 그 사람이 현규를 때리다 노래방 주인이 오고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 갔는데 그 때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날 업고 모텔로 오게 됐대요. 내가 오바이트를 해서 옷이 지저분해진터라 옷을 벗기다가 너무 예뻐보여서... 중학교 때부터 몰래 짝사랑하기도 했었다고... 그렇게 이성을 주체할 수 없었다더군요.
민사장 얼굴이 여기저기 부어 있었고 옷이 찢겨 있었어요. 제 옷도 오물이 묻어 이상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저를 그 사람한테 지키려다가 그랬다는 데... 그리고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제가 매장을 보고 있을때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러긴해도 그 때가 새벽 4시였는데 옷도 엉망이고 몸도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현규에게 씻고 옷을 입은 후에 부를 테니 방에서 나가달라고 했어요. 일단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민사장이 나간 걸 확인하고 겉옷을 챙겨들고 오물을 닦고 샤워를 하고 옷을 벗은 채로 욕실에서 나왔는데...
아마... 민사장이 카운터에 가서 잠깐 나온 사이에 문이 잠겼다고 보조키로 열어달라고 했나봐요. 밖에서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팬티만 입은 채로... 그리고 저에게 달려들며 말했어요... 누나... 누나 몸이 너무 생각나서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고... 전 완강히 거부하려 했지만... 알몸인데다... 그게... 돈 도둑맞은 건 자기가 다 책임을 진다는 말에 약해져서...그만... 아침까지... 계속...”
“아.. 됐어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죠?”
“현규가... 아니 민사장이 어떻게 했는지 이월 상품이 다시 와서 세일은 잘 끝냈어요. 세일이 끝나는 날 술을 한 잔 하자고 해서 그 날도 그만... 그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민사장 말로는 영이가 아이가 어리다고 관계를 자꾸 거부해서 누나 생각이 자꾸 난다고... 그렇게 6개월 정도가 흘렀네요. 그런데... 두 달쯤 전부터 민사장이... 자기 친구 커플이 있는데 같이 만나자고 졸라서... 그 것만은 싫다고... 거부했어요. 그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막가는 것 같아서... 하긴 지금도... 그렇지만...”
친구 커플? 그 때 불고기집의 그 커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프는 와이프대로 두고 내연녀를 이용해서 재미를 보겠다? 쾌락의 끝을 보기위해 달려드는 녀석이다.
“그럼 커플과의 관계는 안한다니까 그렇게 한다던가요?”
“그게... 민사장이 자꾸 졸라도 제가 안한다니까 그럼 알았다고 하더니... 며칠 동안 저를 피하더군요. 낮에도 잠깐 쉴 사이도 없이 일이 있다고 자리를 비우고 저녁 때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면서 문 닫을 시간까지 연락도 없이 오지 않고... 아이 때문에 저녁 7시에는 집에 가서 저녁도 준비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다 일주일 만에 술을 한 잔 마시자기에 저녁에 매장 문을 좀 일찍 닫고 회를 먹으러 갔어요. 현규가 그 동안 미안하다고 누나가 많이 서운했을 거라고 해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술을 먹고 잠깐 쉬었다 가자고 해서 따라 갔는데 가본 적이 없는 최신식 모텔이었어요. 전 술이 많이 취해서... 왜 그런지 평소만큼 마신 것 같은데 그 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요. 그냥 평소처럼 섹스를 하는 줄 알았는데... 민사장 친구가 같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남자가 2명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절 만지는 것 같았어요... 그 땐 술이 너무 취해서 그냥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 겠지 하고 새벽녁에 정신이 들어 모텔을 나오기는 했는데...”
“그런데요? 뭐가 또 있었나요?”
“2~3일 후에 현규가 그러더군요. 그 날 누나는 술에 취해 잘 몰랐던 것 같은데... 자기 친구가 같이 있었다구요. 친구 애인도 함께 있었고... 무슨 소리냐고 난 전혀 기억이 안난다고 했지만... 저한테 동의를 구했는데... 그래도 된다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근처에 있던 친구 커풀을 불렀다고... 그게 알게 모르게 4명이 서로 커플로 많이 즐긴대요. 물론 믿을만한 사람들끼리... 전 민사장한테 화를 내고 매장을 그만둔다고 했어요. 하지만...”
“예...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누나가 그렇게 싫어할 줄 알았다면 안했을 거라고 사과하더군요. 그리고 예전에 돈을 도둑맞은 것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면서... 그 것도 빨리 갚으려고 열심히 노력중이라고... 자긴 나름대로 누나한테 피해 안주려고 그러는데 누나는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하지만 점점 매출이 오르고 있으니 다음 달부터 누나 월급도 올려주려고 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자꾸 사정을 이야기하면 약해지더군요... 저도 애 아빠한테 위자료 받은 게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월급도 많고 아이나 어머니 가져다주라고 세일 상품 같은 것도 많이 챙겨주고 해서... 그런 짓은 일단 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았었는데... 며칠 전에도 유혹을 하더군요. 그렇게 한 번 같이 어울려주면 그 때마다 20만원씩 보너스를 주겠다고... 일단 한 번 거절은 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던 중이었어요. 영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정재희가 그 말을 하며 내 눈을 쳐다보았다. 영이가 뒷조사를 시켰을 줄은 꿈에다 몰랐다는 의미로 보였다. 나는 오른 손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결국 고민은 이 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가였다. 어떻게 보면 경찰 앞에서 진술하듯이 털어놓은 이 이야기를 한 정재희는 자신이 유리하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건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민사장과의 관계에서 정재희는 얼마나 성적 쾌락을 느끼고 있는지... 남편보다 훨씬 젊고 단단한 체구의 민현규를 정재희가 더 놓치기 싫어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월급이나 부수익도 생긴다면 더더욱... 또 궁금한 건 정재희 말이 다 사실이라면 그냥 강간 비슷한 걸 당했다라는 표현을 쓰면 되는 데 왜 반응을 했다는 표현을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여자 잎에서 나오기는 쉽지 않은 말인데...
이런 저런 의혹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난 결정을 해야 했다. 무언가를... 30여분이 지난 후에야 난 입을 열었다.
“아까 민사장에게 이야기하면 가게를 그만둘 수 있다고 이야기 하셨지요? 그게 가능한가요?”
“모르겠어요. 사정을 해 봐야지요. 갑자기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저번에도 분명히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이야기했었고...”
“아니... 가게를 그만두면 생계유지가 가능하신가 해서요. 아이도 있으신데...”
“위자료 받은 게 있어서 당분간은... 장사밑천으로 남겨 놓은 돈이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재희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혹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남자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항상 느끼고 살아왔을 터... 그녀는 분명 매력이 있었다. 정재희는 내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게 되면 그 사실을 밝힐 가능성이 적어진다고 느낌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혼녀이고 누구의 여자도 아니니 민현규가 아닌 나와 관계를 맺는 다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난 정재희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그 방법은 내키지 않았다. 당시 미정이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면죄부를 받기 전에 누군가를 안는다는 것이 내심 겁이 났는데 하늘에서 미정이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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