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잠시 다녀올 때가 있다고 하고 미정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면소재지에 있는 농협에 가서 내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을 모두 인출했다. 200만원 정도 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 중에서 10만원 가량을 내 지갑에 넣고 나머지는 미정이 할머니께 드리기 위해 봉투에 담아 두고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난 그날 밤에 미정이네 집에서 잘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낮에 미정이 친구 선희를 만나고 또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낸 후에 저녁 무렵에 할머니를 찾아뵙고 미정이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미정이 친구 선희네 집에 도착한 건 오후 3시 ~ 4시 경이었는데 집 앞에서 기웃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열린 쪽문 안으로 “계십니까?”하고 외치자 약간 키가 작은 젊어 보이는 아가씨가 마루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누구세요?”
“아.. 저는... 미정이의 남자 친구였는데요... 이 집이 친구 선희씨 집이라고 해서...”
“아.. 예... 은지한테 들었어요. 잠깐 들어오세요. 부모님은 점심 드시고 일하러 가셔서 아무도 없어요.”
50가구 남짓한 작은 어촌 부락인지라 이 애를 데리고 밖에서 이야기 하는 것도 어색한 터에 잘 됐다. 난 다소 어색한 걸음걸이로 집으로 들어갔다. 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선희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한 잔 따라서 내 앞에 놓는다.
“그러지 않아도 목이 말랐는데 고맙습니다.”
“미정이와 같은 회사에 다니셨나봐요. 서울에서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아마 동네 사람들에게는 다방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취직을 했다고 이야기 했을지도... 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은지라는 아가씨에게 했던 질문을 좀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혹시 미정이가 학교 다닐 때 남자를 사귄 적이 없었나요?”
“아니요. 이 곳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한 학년에 두 개 반 밖에 없어서 그런 일이 있으면 다음 날이면 모두 알게 되요. 미정이에게 관심가지는 애들은 많았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그런 게 궁금하시죠?”
난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전 솔직히 미정이를 많이 좋아했어요. 부모님 반대로 결혼이 어려워졌지만... 하지만 저와의 일들이 그렇게 어이 없이 세상을 져버릴 만큼 큰 상처였을까 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려요. 그래서... 학창 시절이 궁금해졌어요. 또 다른 아픔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계속해서 단짝으로 보냈고 남자애들이 준 미정이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나 쪽지를 제가 전해 준 것도 여러번이지만 정작 그 애는 그런 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어요.”
“그럼 한 번도 남자를 사귀는 걸 본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예. 제가 알기론 한 번도...”
아무래도 미정이가 처녀성을 잃게 된 건 또래의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선희가 모른다면 괜히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예...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마루에서 내려와 구두를 신으며 선희에게 다시 물었다.
“선희씨와 미정이가 떨어져 지낸 적은 없나요? 이를테면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해도 선희씨가 모를 수도 있을 그런....”
“음... 그러니까... 있긴 있어요. 중학교 3학년 무렵 미정이는 이 곳 대표 수영선수라 바빳어요. 합숙훈련이나 전지훈련을 할 때도 많았구요. 그 때 일은... 같은 수영부였던 유진이가 잘 알꺼예요. 유진이는 이 동네에 살지는 않아요. 유진이 집이 여기서 멀진 않지만 지금 부산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데 방학이라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지금도 그 학교에 수영부가 있나요? 혹시 그 때 감독이나 코치선생님이 있다면...”
“아니요. 지금은 없어졌어요. 학교에 수영장이 없어서 근처 학생체육관을 빌려 운영하다 3년쯤 전에 배트민턴부가 생기면서...”
난 선희에게 유진이라는 친구의 연락처를 묻고 지금은 모르지만 알아봐준다는 대답을 들은 후에 내 연락처를 주고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근처 조용한 방파제에 차를 대고 바다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에 미정이네 집으로 갔다.
할머니가 저녁 식사를 했냐고 묻길래 아직이라고 했더니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식사를 차려 주셨다. 보리가 많이 섞여 있는 밥과 묵은 김치. 시래기 국... 밥상을 받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미정이는 이런 밥을 먹으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꿈을 키웠을 텐데...
저녁을 먹은 후에 미정이 사진을 좀 볼 수 있냐고 했더니 방구석에서 할머니가 손녀의 사진첩을 내 오셔서 보여 주셨다. 친구들 보다 키가 훨씬 큰 미정이는 사진 속에서 항상 활짝 웃는 얼굴이었는데 남자와 같이 찍은 사진은 몇 장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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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김유미와 단발머리를 동시에 가진 후 주말을 지나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몇 가지 일을 정리한 후에 난 단발머리의 차량 번호 조회를 김배영 경사에게 부탁했다. 항상 그렇듯이 몇 마디 궁시렁 궁시렁 거린 후에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김경사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1시간 후였다.
“석훈씨.. 이 주소 예전에 조회했었던 그 주소랑 똑같은 데 아냐?”
“뭐? 무슨 소리야.. 저번엔 처남 집 밑에 사다리차 댈 자리를 막고 있어서 그랬고 이번엔 내 차가 긁혀 있는데 근처에 수상한 차량이 있어서 조회 부탁한 거잖아...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 차량도 이건 소울인데...”
“그래? 이 차도 자양동 현대 2차 아파트인데.. 저번에도 거기 아니었었나?”
난 태연한 척 말을 했으나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 했다.
“몰라.. 잘 기억이 안나... 서울이었던 것 같긴 한데... 몇 동 몇 호야?”
“204동 1503호 황지연. 여자가 모는데...”
“응 여자들은 감각이 둔하니까 긁고 지나가도 모를 수 있어.. 차 옆에서 기다리다가 나오면 물어봐야지.. 내 차 페인트 그대로 묻어 있어서 맞는 것 같은데... 어쨌든 고마워..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근무야?”
“아니 비번... 왜 술 한잔 사려고? 후후”
“응 회 사줄게... 배영씨 회 좋아하잖아...”
“그럼 오랜 만에 얼굴 한번 볼까?”
“응 그날 다시 전화할게. 아참 그 여자 몇 년생이지? 나이 많은 아줌마면 시치미 떼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럼 곤란한데...”
“응?... 아 80년생..”
김경사와 전화를 끊고 일전에 다이어리에 적어 두었던 이유성의 주소를 다시 보니 둘의 주소가 같다. 나이는 단발머리, 아니 황지연이 2살 위... 이건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같은 주소면 부부 아니면 오누이... 또 뭐가 있지? 30살이 넘어서 이성끼리 계약 동거? 하지만 황지연의 당황한 모습을 보면...
난 황지연의 직업을 법원 직원, 검찰 직원 아니면 검,판사 그것도 아니면 경찰 쪽의 꽤 높은 직급, 6급 이상의 시청이나 구청 공무원, 방송국 혹은 신문사 기자 정도로 압축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다면 인터넷 검색으로도 어느 정도 까지는 찾을 수 있다.
사진을 올려놓지 않는 기관에서도 이름 정도는 검색이 가능하고 이름이 없다면 전화를 해봐서라도 일단 동명이인을 찾고 나중에 그 곳에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가능할 것이다. 서울 자양동에 있는 아파트에 가서 기다리다 미행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이 방법으로 찾아보고 안 되면 마지막에 해볼 생각이었다.
검색의 시작은 강원도였다. 서울, 경기 지방은 기관들이 너무 많고 찾기가 만만치 않은 점도 있지만 그 것보다는 황지연을 처음 만난 날 중얼거린 "개자식. 강원도로 옮기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라는 말 때문이었다. 황지연과의 첫 만남은 불과 보름 전의 일... 그녀의 직장은 강원도에 있을 것이다. 아마 이유성과의 일 때문에 강원도로 옮겨 가지 않았을까 의심이 갔다.
그렇다면 그 둘은 부부사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유성이 황지연을 쫓아다녀서 강원도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황지연이 이유성을 데리고 가기 위해 강원도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이유성을 떼어놓기 위해서일까? 부부사이라면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이유성을 뒤로 하고 내 차에 탄 이유는 뭐지?
일단 찾고 나서 생각해 보자.
먼저 법원.. 인터넷 전국 법원 서비스를 들어가보니 강원도 내 법원은 군에 있는 지원까지 17개.. 안타깝게도 직원 이름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다. 할 수 없이 17군데 모두 전화번호를 인쇄해서 사무실 밖으로 나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꼬박 점심 먹을 때까지 2시간 동안 통화했지만 황지연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업무처리 좀 하다 오후에 다시 시작.
다음은 검찰청.. 강원도 내 춘천지방검찰청 및 4개 지청.. 이 곳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직원 이름은 검색 불가.. 5군데 밖에 안되니 다시 전화... 그 이름을 가진 여자 검사나 직원은 없다..
다음 경찰청. 강원지방경찰청과 도내 17개 경찰서... 열 번 째가 넘어갔을 때 00경찰서 민원실과의 통화에서 입질이 왔다.
“혹시 여직원 분 중에 황지연이라는 분이 계실까요? 경위나 경감쯤 될텐데요.”
“예. 계세요. 생활질서계 계장님이신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연결해드릴까요?”
“아 친척오빠예요. 저번에 결혼식 때 만났는데 그 곳에서 근무한다고 해서요.. 연결 부탁드립니다.”
“예 잠시만요.. 혹시 끊어지시면 033-430-××××으로 하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전화가 돌아갔다.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생활질서계장입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소프라노톤이지만 약간 가성이 섞여 있고 마지막을 탁탁 끊는 목소리. 단발머리다. 반나절 만에 찾았군. 경감 황지연. 난 전화를 끊었다.
그 곳이면 서울 외곽에서 차만 막히지 않는다면 2시간 반거리... 거기서 이유성을 찾아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하긴 처음 만난 날이 토요일. 그 다음 만남이 2주후 금요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녀가 이유성과 부부라면 그 곳에도 주거지가 있을 것이다. 주소를 옮기지 않은 걸 보면 다시 서울로 들어올 생각인가?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텐데...
80년생. 32세의 나이로 경감이라.. 경찰대 출신일 가능성이 많겠다. 1년에 경대생 중에 여자는 열 명 남짓 뽑는데.. 대충 99~2000년에 입학해서 4년 교육 받고 임용.. 7~9년차. 경위에서 경감까지 그 기간에 가능하나? 요즘 10년 이상 걸린다던데... 서울에 주거지가 있는 걸로 보면 임용은 서울이나 경기지역.. 이 여자 엘리트다. 화려하군. 그 미모에 경감이라니...
이 정도 여자라면 내가 본인 정체를 안다는 걸 들킨다면 다음 만남이 보장되지 않는다. 줄곧 내게 보이는 태도에서도 몸은 주었을지언정 마음은 한 번도 열어주지 않았고...
무언가를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한다면 가능할까? 미지수... 어렵다. 어디로 튈지 짐작하기가 힘든데... 은연중에라도 내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여자가 그런 협박에 굴복할까?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엮일 일이 없다는 방심 때문에 내게 하루 밤을 허용했다. 며칠 전 차안에서의 일도 그때까지는 익명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저항하다 포기했을 것이고...아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꼬였다. 하지만 김유미 쪽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된 듯... 황지연은 섣불리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성과 김유미는 그냥 내연의 관계일까? 그러기엔 그 둘 나이 차이도 심하고 어울리지 않는데... 나이 차이가 띠 동갑 정도 되는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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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흘러갔고 난 회사와 집을 오가며 김유미와 이유성, 황지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황지연을 제쳐 두고 생각하면 내가 한 달에 한두 번 쯤 김유미에게 연락해서 그녀를 안는 것은 무리가 없다.
더 이상 나아가서는 안 돼는 걸까?
황지연에게는 다르게 말했지만 애초에 잠자고 있던 내 욕정에 불씨를 당긴 건 김유미였다. 난 그녀의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몸매, 친절하고 또 듣고 싶은 목소리에서 풍기는 언밸런스를 인정하기 싫었고 그것 때문에 강간까지 시도하려고 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단발머리 황지연이 경찰 간부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해도 그건 내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냥 여자일뿐 이다.
두 여자를 다른 방에 넣어 두고 한 여자만 선택하라고 하면 난 고민도 하지 않고 김유미의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 선택의 기준은 쾌락보다는 따뜻함 쪽으로 기운다. 고대 로마 시대에 잘 나가는 귀족 부인이 욕정을 채우기 위해 젊고 잘생긴 노예에게 자신을 만지고 안으라고 했다면 그 노예는 마음대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을까?
만약 내게 김유미를 제외한 황지연 밖에 선택이 없다면 난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이 가능할까?
이런 저런 고민 속에 일주일이 그냥 지나갔고 토요일 난 아들을 데리고 김유미의 오피스텔로 갔다. 아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담배를 피우려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을 때 골목 저편 멀리 주차되어 있는 아이보리색 소울이 보였다.
아까 들어올 때도 저 차가 있었나? 설마 황지연이 온 건 아니겠지? 저 색깔 소울이 한 두 대도 아니고...
내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내가 담배를 꺼내 물기도 전에 차문이 열렸고 그 차에서 내린 건 황지연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대낮에 그녀를 본 건 처음이었는데 코트를 입지는 않았지만 위 아래 같은 색깔의 버튼이 하나 달린 남색 치마 정장과 같은 색 스타킹. 풍성한 느낌이 나는 자주색 브라우스... 아 진짜. 우라지게 예쁘다.
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그녀에게 시선이 꽂힌 채로 멈춰 버렸다. 황지연은 내 앞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오더니 두 발자국 정도 사이를 두고 멈춰 서서 내게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뭐냐? 웬 존대냐? 싸가지를 밥 말아 처먹은 것처럼 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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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날 밤에 미정이네 집에서 잘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낮에 미정이 친구 선희를 만나고 또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낸 후에 저녁 무렵에 할머니를 찾아뵙고 미정이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미정이 친구 선희네 집에 도착한 건 오후 3시 ~ 4시 경이었는데 집 앞에서 기웃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열린 쪽문 안으로 “계십니까?”하고 외치자 약간 키가 작은 젊어 보이는 아가씨가 마루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누구세요?”
“아.. 저는... 미정이의 남자 친구였는데요... 이 집이 친구 선희씨 집이라고 해서...”
“아.. 예... 은지한테 들었어요. 잠깐 들어오세요. 부모님은 점심 드시고 일하러 가셔서 아무도 없어요.”
50가구 남짓한 작은 어촌 부락인지라 이 애를 데리고 밖에서 이야기 하는 것도 어색한 터에 잘 됐다. 난 다소 어색한 걸음걸이로 집으로 들어갔다. 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선희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한 잔 따라서 내 앞에 놓는다.
“그러지 않아도 목이 말랐는데 고맙습니다.”
“미정이와 같은 회사에 다니셨나봐요. 서울에서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아마 동네 사람들에게는 다방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취직을 했다고 이야기 했을지도... 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은지라는 아가씨에게 했던 질문을 좀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혹시 미정이가 학교 다닐 때 남자를 사귄 적이 없었나요?”
“아니요. 이 곳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한 학년에 두 개 반 밖에 없어서 그런 일이 있으면 다음 날이면 모두 알게 되요. 미정이에게 관심가지는 애들은 많았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그런 게 궁금하시죠?”
난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전 솔직히 미정이를 많이 좋아했어요. 부모님 반대로 결혼이 어려워졌지만... 하지만 저와의 일들이 그렇게 어이 없이 세상을 져버릴 만큼 큰 상처였을까 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려요. 그래서... 학창 시절이 궁금해졌어요. 또 다른 아픔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계속해서 단짝으로 보냈고 남자애들이 준 미정이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나 쪽지를 제가 전해 준 것도 여러번이지만 정작 그 애는 그런 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어요.”
“그럼 한 번도 남자를 사귀는 걸 본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예. 제가 알기론 한 번도...”
아무래도 미정이가 처녀성을 잃게 된 건 또래의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선희가 모른다면 괜히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예...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마루에서 내려와 구두를 신으며 선희에게 다시 물었다.
“선희씨와 미정이가 떨어져 지낸 적은 없나요? 이를테면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해도 선희씨가 모를 수도 있을 그런....”
“음... 그러니까... 있긴 있어요. 중학교 3학년 무렵 미정이는 이 곳 대표 수영선수라 바빳어요. 합숙훈련이나 전지훈련을 할 때도 많았구요. 그 때 일은... 같은 수영부였던 유진이가 잘 알꺼예요. 유진이는 이 동네에 살지는 않아요. 유진이 집이 여기서 멀진 않지만 지금 부산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데 방학이라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지금도 그 학교에 수영부가 있나요? 혹시 그 때 감독이나 코치선생님이 있다면...”
“아니요. 지금은 없어졌어요. 학교에 수영장이 없어서 근처 학생체육관을 빌려 운영하다 3년쯤 전에 배트민턴부가 생기면서...”
난 선희에게 유진이라는 친구의 연락처를 묻고 지금은 모르지만 알아봐준다는 대답을 들은 후에 내 연락처를 주고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근처 조용한 방파제에 차를 대고 바다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에 미정이네 집으로 갔다.
할머니가 저녁 식사를 했냐고 묻길래 아직이라고 했더니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식사를 차려 주셨다. 보리가 많이 섞여 있는 밥과 묵은 김치. 시래기 국... 밥상을 받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미정이는 이런 밥을 먹으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꿈을 키웠을 텐데...
저녁을 먹은 후에 미정이 사진을 좀 볼 수 있냐고 했더니 방구석에서 할머니가 손녀의 사진첩을 내 오셔서 보여 주셨다. 친구들 보다 키가 훨씬 큰 미정이는 사진 속에서 항상 활짝 웃는 얼굴이었는데 남자와 같이 찍은 사진은 몇 장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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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김유미와 단발머리를 동시에 가진 후 주말을 지나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몇 가지 일을 정리한 후에 난 단발머리의 차량 번호 조회를 김배영 경사에게 부탁했다. 항상 그렇듯이 몇 마디 궁시렁 궁시렁 거린 후에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김경사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1시간 후였다.
“석훈씨.. 이 주소 예전에 조회했었던 그 주소랑 똑같은 데 아냐?”
“뭐? 무슨 소리야.. 저번엔 처남 집 밑에 사다리차 댈 자리를 막고 있어서 그랬고 이번엔 내 차가 긁혀 있는데 근처에 수상한 차량이 있어서 조회 부탁한 거잖아...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 차량도 이건 소울인데...”
“그래? 이 차도 자양동 현대 2차 아파트인데.. 저번에도 거기 아니었었나?”
난 태연한 척 말을 했으나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 했다.
“몰라.. 잘 기억이 안나... 서울이었던 것 같긴 한데... 몇 동 몇 호야?”
“204동 1503호 황지연. 여자가 모는데...”
“응 여자들은 감각이 둔하니까 긁고 지나가도 모를 수 있어.. 차 옆에서 기다리다가 나오면 물어봐야지.. 내 차 페인트 그대로 묻어 있어서 맞는 것 같은데... 어쨌든 고마워..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근무야?”
“아니 비번... 왜 술 한잔 사려고? 후후”
“응 회 사줄게... 배영씨 회 좋아하잖아...”
“그럼 오랜 만에 얼굴 한번 볼까?”
“응 그날 다시 전화할게. 아참 그 여자 몇 년생이지? 나이 많은 아줌마면 시치미 떼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럼 곤란한데...”
“응?... 아 80년생..”
김경사와 전화를 끊고 일전에 다이어리에 적어 두었던 이유성의 주소를 다시 보니 둘의 주소가 같다. 나이는 단발머리, 아니 황지연이 2살 위... 이건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같은 주소면 부부 아니면 오누이... 또 뭐가 있지? 30살이 넘어서 이성끼리 계약 동거? 하지만 황지연의 당황한 모습을 보면...
난 황지연의 직업을 법원 직원, 검찰 직원 아니면 검,판사 그것도 아니면 경찰 쪽의 꽤 높은 직급, 6급 이상의 시청이나 구청 공무원, 방송국 혹은 신문사 기자 정도로 압축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다면 인터넷 검색으로도 어느 정도 까지는 찾을 수 있다.
사진을 올려놓지 않는 기관에서도 이름 정도는 검색이 가능하고 이름이 없다면 전화를 해봐서라도 일단 동명이인을 찾고 나중에 그 곳에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가능할 것이다. 서울 자양동에 있는 아파트에 가서 기다리다 미행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이 방법으로 찾아보고 안 되면 마지막에 해볼 생각이었다.
검색의 시작은 강원도였다. 서울, 경기 지방은 기관들이 너무 많고 찾기가 만만치 않은 점도 있지만 그 것보다는 황지연을 처음 만난 날 중얼거린 "개자식. 강원도로 옮기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라는 말 때문이었다. 황지연과의 첫 만남은 불과 보름 전의 일... 그녀의 직장은 강원도에 있을 것이다. 아마 이유성과의 일 때문에 강원도로 옮겨 가지 않았을까 의심이 갔다.
그렇다면 그 둘은 부부사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유성이 황지연을 쫓아다녀서 강원도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황지연이 이유성을 데리고 가기 위해 강원도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이유성을 떼어놓기 위해서일까? 부부사이라면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이유성을 뒤로 하고 내 차에 탄 이유는 뭐지?
일단 찾고 나서 생각해 보자.
먼저 법원.. 인터넷 전국 법원 서비스를 들어가보니 강원도 내 법원은 군에 있는 지원까지 17개.. 안타깝게도 직원 이름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다. 할 수 없이 17군데 모두 전화번호를 인쇄해서 사무실 밖으로 나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꼬박 점심 먹을 때까지 2시간 동안 통화했지만 황지연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업무처리 좀 하다 오후에 다시 시작.
다음은 검찰청.. 강원도 내 춘천지방검찰청 및 4개 지청.. 이 곳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직원 이름은 검색 불가.. 5군데 밖에 안되니 다시 전화... 그 이름을 가진 여자 검사나 직원은 없다..
다음 경찰청. 강원지방경찰청과 도내 17개 경찰서... 열 번 째가 넘어갔을 때 00경찰서 민원실과의 통화에서 입질이 왔다.
“혹시 여직원 분 중에 황지연이라는 분이 계실까요? 경위나 경감쯤 될텐데요.”
“예. 계세요. 생활질서계 계장님이신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연결해드릴까요?”
“아 친척오빠예요. 저번에 결혼식 때 만났는데 그 곳에서 근무한다고 해서요.. 연결 부탁드립니다.”
“예 잠시만요.. 혹시 끊어지시면 033-430-××××으로 하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전화가 돌아갔다.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생활질서계장입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소프라노톤이지만 약간 가성이 섞여 있고 마지막을 탁탁 끊는 목소리. 단발머리다. 반나절 만에 찾았군. 경감 황지연. 난 전화를 끊었다.
그 곳이면 서울 외곽에서 차만 막히지 않는다면 2시간 반거리... 거기서 이유성을 찾아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하긴 처음 만난 날이 토요일. 그 다음 만남이 2주후 금요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녀가 이유성과 부부라면 그 곳에도 주거지가 있을 것이다. 주소를 옮기지 않은 걸 보면 다시 서울로 들어올 생각인가?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텐데...
80년생. 32세의 나이로 경감이라.. 경찰대 출신일 가능성이 많겠다. 1년에 경대생 중에 여자는 열 명 남짓 뽑는데.. 대충 99~2000년에 입학해서 4년 교육 받고 임용.. 7~9년차. 경위에서 경감까지 그 기간에 가능하나? 요즘 10년 이상 걸린다던데... 서울에 주거지가 있는 걸로 보면 임용은 서울이나 경기지역.. 이 여자 엘리트다. 화려하군. 그 미모에 경감이라니...
이 정도 여자라면 내가 본인 정체를 안다는 걸 들킨다면 다음 만남이 보장되지 않는다. 줄곧 내게 보이는 태도에서도 몸은 주었을지언정 마음은 한 번도 열어주지 않았고...
무언가를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한다면 가능할까? 미지수... 어렵다. 어디로 튈지 짐작하기가 힘든데... 은연중에라도 내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여자가 그런 협박에 굴복할까?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엮일 일이 없다는 방심 때문에 내게 하루 밤을 허용했다. 며칠 전 차안에서의 일도 그때까지는 익명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저항하다 포기했을 것이고...아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꼬였다. 하지만 김유미 쪽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된 듯... 황지연은 섣불리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성과 김유미는 그냥 내연의 관계일까? 그러기엔 그 둘 나이 차이도 심하고 어울리지 않는데... 나이 차이가 띠 동갑 정도 되는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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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흘러갔고 난 회사와 집을 오가며 김유미와 이유성, 황지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황지연을 제쳐 두고 생각하면 내가 한 달에 한두 번 쯤 김유미에게 연락해서 그녀를 안는 것은 무리가 없다.
더 이상 나아가서는 안 돼는 걸까?
황지연에게는 다르게 말했지만 애초에 잠자고 있던 내 욕정에 불씨를 당긴 건 김유미였다. 난 그녀의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몸매, 친절하고 또 듣고 싶은 목소리에서 풍기는 언밸런스를 인정하기 싫었고 그것 때문에 강간까지 시도하려고 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단발머리 황지연이 경찰 간부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해도 그건 내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냥 여자일뿐 이다.
두 여자를 다른 방에 넣어 두고 한 여자만 선택하라고 하면 난 고민도 하지 않고 김유미의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 선택의 기준은 쾌락보다는 따뜻함 쪽으로 기운다. 고대 로마 시대에 잘 나가는 귀족 부인이 욕정을 채우기 위해 젊고 잘생긴 노예에게 자신을 만지고 안으라고 했다면 그 노예는 마음대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을까?
만약 내게 김유미를 제외한 황지연 밖에 선택이 없다면 난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이 가능할까?
이런 저런 고민 속에 일주일이 그냥 지나갔고 토요일 난 아들을 데리고 김유미의 오피스텔로 갔다. 아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담배를 피우려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을 때 골목 저편 멀리 주차되어 있는 아이보리색 소울이 보였다.
아까 들어올 때도 저 차가 있었나? 설마 황지연이 온 건 아니겠지? 저 색깔 소울이 한 두 대도 아니고...
내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내가 담배를 꺼내 물기도 전에 차문이 열렸고 그 차에서 내린 건 황지연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대낮에 그녀를 본 건 처음이었는데 코트를 입지는 않았지만 위 아래 같은 색깔의 버튼이 하나 달린 남색 치마 정장과 같은 색 스타킹. 풍성한 느낌이 나는 자주색 브라우스... 아 진짜. 우라지게 예쁘다.
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그녀에게 시선이 꽂힌 채로 멈춰 버렸다. 황지연은 내 앞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오더니 두 발자국 정도 사이를 두고 멈춰 서서 내게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뭐냐? 웬 존대냐? 싸가지를 밥 말아 처먹은 것처럼 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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